창조절 아홉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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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구절 여호수아기 3:14-17/ 데살로니가전서 2:9-13/ 마태복음서 23:1-12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11-01
전주 하나님 말씀 안에 살게 하소서(D. Buxtehude)
찬양1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Swedish Folk Melody) 특송: 윤경희 권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 나의 이름 부를 때(이필립 곡) 특송: 김경원 집사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P. P. Bliss)
후주2부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P. P. Bliss)
성경본문 여호수아기 3:14-17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진을 떠날 때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 앞에서 나아갔다. 그 궤를 멘 사람들이 요단 강까지 왔을 때에는, 마침 추수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 올랐다.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물 가에 닿았을 때에,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다. 그리고 멀리 사르단 근처의 아담 성읍에 둑이 생겨, 아라바의 바다 곧 사해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완전히 끊겼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서, 온 백성이 모두 요단 강을 건널 때까지, 주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었다.

데살로니가전서 2:9-13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또, 신도 여러분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이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증언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증언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우리는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경고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23:1-12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 모세는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으나,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는 백스무 살의 나이에 죽기 전,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백성의 지도자로 세웠는데, 여호수아는 젊었을 때부터 모세를 곁에서 모셔온 부관으로(33,11; 11,28),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야훼가 구원하신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여호수아는 출애굽 후 첫 번째 전투, 곧 아말렉 족속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17,8-13).

하나님은 모세를 이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 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1,6-9).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토착민들과 전쟁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보다 훨씬 문명화되고, 철기로 무장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부족들과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끊임없이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말라. 주님께서 친히 그대 앞에서 가시며, 그대와 함께 계시며, 그대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31,8)고 여호수아에게 선언했고, 하나님도 굳세고 용감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여호수아가 두려움 없는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7).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이 말씀은 흔히 판단에 있어서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나, 행위에 있어서 편파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좌건 우건, 극단으로 치닫는 판단이나 행위는 사태의 본질을 잘 못 볼 수 있게 하고, 또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맞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이,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결단해야 할 순간에 기회주의적 처신을 정당화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에 의해 악용된다는 것도 압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할 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면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것은 비겁한 행위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너희는 할 때에는 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5,37). 만일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앞에서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했다면, 십자가 죽음을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이 말씀은, 모든 성경 해석이 그렇듯이, 이것이 말해진 콘텍스트와의 관련성에서 살펴보아야 그 올바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영어성경에는 이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기 17절의 영어 번역은 용기 백배, 있는 힘을 다 내어라. 그래서 내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것()을 한눈 팔지 말고 성심껏 지켜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라.’(1,7)입니다. ‘한눈 팔지 말고 하나님의 율법을 성심껏 지키라는 뜻이지, 여기에는 정치적 좌우나, 윤리적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라는 의미가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라는 뜻이지요.

 

이 말은 신명기에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성심껏 지켜야 하며,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5,32). 이 역시 계명 준수에 대한 성실성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도를 규정할 때도 같은 의미입니다: ‘왕위에 오른 사람은 이 율법책을 두루마리에 옮겨 적어,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어김없이 지켜야 합니다. 마음이 교만해져서 자기 겨레를 업신여기는 일도 없고, 그 계명을 떠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그와 그의 자손이 오래도록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게 될 것입니다’(17,19-20)

 

그렇습니다. 이 말의 본뜻은 기회주의적 처세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공부하여, 이 율법 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라는 데’(1,8)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는 이 말씀이 여호수아가 가나안 토착민들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주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강력한 토착민들(가나안 사람, 헷 사람, 히위 사람, 브리스 사람, 기르가스 사람, 아모리 사람, 여부스 사람들) 앞에서 겁에 질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상황입니다. 요단강도 추수 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올라 건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에 앞서 요단 강가에 닿았을 때에, 흐르던 물이 멈추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안전하게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3,14-17).

 

그렇습니다. 앞에 있는 넘치는 강과 강력하게 무장한 적들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양비론이나, ‘너도 옳고, 나도 옳다양시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때가 아니라, 단호하게 확신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공부하여, 성심껏 실천해야 합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의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의 박해와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살전 1,3),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살전 2,13). 데살로니가 공동체 안에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동족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 선교도 방해하였고(살전 3,14-16), 주님의 재림과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살전 4,13-17).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말이라고 깎아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바울이 어찌 하나님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말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데살로니가 공동체는 그의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신앙과 신학, 그의 삶과 인격이 전제된 명백한 사람의 말입니다. 자기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명백하게 사람의 말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심한 모욕과 반대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살전 2,2-4). 바울이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려고 했거나, 구실을 꾸며 탐욕을 부리려고 했다면, 사람의 환심을 사는 아첨을 했을 것입니다(살전 2,4-5).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살전 4,1).

 

데살로니가 공동체는 주후 49년에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고,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보낸 바울의 첫 번째 편지는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은 여러 차례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려고 시도 했으나, 그 때마다 방해를 받아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제자인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고, 바울은 혼자 고린도로 향했는데, 여기에서 이른바 글라우디오 칙령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한 여파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는 주후 49년 로마의 유다 사회 내부에서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소요와 폭동을 동반한 투쟁이 발생하자 소요의 지도자들과 소요에 참가한 유대인들은 반드시 로마를 떠나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벌써 이 시기에 유대교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진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선교활동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공동체로부터 기쁜 소식이 들려온 것이지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 위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처음 방문했을 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을 상기한 바울은(살전 1,6), 지금도 성도들이 바울의 말씀을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증거라는 것이지요(살전 2,13).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공동체를 재림하실 주님 앞에서, 희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선언합니다(살전 2,19).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갈 힘을 줍니다(살전 2,12).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쓸 수 있는 힘도, 항상 기뻐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 힘도,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힘도(살전 5,15-18), 오직 하나님의 말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3.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도 자칫 오해될 수 있습니다. 마태가 23장에 모아놓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들의 언행불일치에 초점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는 말씀 때문이지요(23,3).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집단이었습니다. 아니 율법이 정한 것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을 옛날 예언자들을 존경하듯이 한량없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공경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별된 자’, 즉 이스라엘의 참된 공동체요 성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리새파는 비록 상류층은 아니었지만, 용감하고 율법에 온전히 헌신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언행불일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라는 데 있는 것입니다(23,5).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종종 분에 넘치거나 마음에도 없는 과장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인정욕구에서 비롯되었건, 자기과시와 평판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랬건,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과 행동은 나무랄 데 없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이 그치고, 사람들의 칭찬이 끝나는 순간, 그런 드러난 선행도 함께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23,11-1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는 섬기는 사람이 낮은 사람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으뜸이 될 것이고, 세상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무시당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높아질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역전과 보상이 하늘나라나 종말의 때로 유예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전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20,28)고 말씀 하신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되고,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안다고 말한 것이지요(요일 2,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까닭은 어쩔 수 없는 의무감이나, 사람들에게 보이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는 사람만이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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