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여덟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조회수   788
설교제목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성경구절 창세기 29:20-28/ 로마서 8:35-39/ 마태복음서 13:31-33, 44-52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7-26
전주 내 영이 주를 찬양하나이다(F. Couperin)
찬양1부 주님은 나의 목자(Eric H. Thiman) 특송: 송승연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그가 아시나니(이서연 곡) 특송: 김준홍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주의 사랑의 물결, 내 영혼을 덮으소서(W. G. Cooper)
후주2부 주의 사랑의 물결, 내 영혼을 덮으소서(W. G. Cooper)
성경본문 창세기 29:20-28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고 칠 년 동안이나 일을 하였지만,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칠 년이라는 세월을 마치 며칠같이 느꼈다. 칠 년이 지난 뒤에, 야곱이 라반에게 말하였다. "약속한 기한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장가를 들게 해주십시오. 라헬과 결혼하겠습니다." 라반이 그 고장 사람들을 다 청해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밤이 되었을 때에, 라반은 큰 딸 레아를 데려다가 신방으로 들여보냈는데, 야곱은 그것도 모르고, 레아와 동침하였다. 라반은 여종 실바를 자기 딸 레아에게 몸종으로 주었다. 아침이 되어서 야곱이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야곱이 라반에게 말하였다. "외삼촌께서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그 동안 라헬에게 장가를 들려고 외삼촌 일을 해 드린 것이 아닙니까? 외삼촌께서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라반이 대답하였다. "큰 딸을 두고서 작은 딸부터 시집보내는 것은, 이 고장의 법이 아닐세. 그러니 이레 동안 초례 기간을 채우게. 그런 다음에 작은 아이도 자네에게 주겠네. 그 대신에 자네는 또 칠 년 동안 내가 맡기는 일을 해야 하네." 야곱은 그렇게 하였다. 그가 레아와 이레 동안 지내고 나니, 라반은 자기 딸 라헬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로마서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서 13:31-33, 44-52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살짝 섞어 넣으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버린다. 세상 끝 날에도 이렇게 할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서, 그들을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니,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예"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1. 하늘나라에 대한 겨자씨 비유누룩의 비유는 일반적으로 아주 작은 것에서 대단히 큰 것으로 변하는 대변환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거나, 보이지 않는 적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온통 부풀리는 것처럼, 하늘나라도 잘 보이지 않고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친구 빌닷이 욥에게 한 말,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8,7)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도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나무처럼 세상에서 큰 인물이 되어, 사람들이 그 그늘아래 쉬어갈 수 있어야 하고, 밀가루를 온통 부풀리는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세상에 스며들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교훈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우리가 그런 인물이 되지 못해서 그렇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큰 인물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팔레스타인 현지의 겨자가 나무라기보다는 큰 가지로 크는 잡초에 가깝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런 해석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겨자는 들에 널려 있는 흔히 볼 수 있는 잡초입니다. 그러니 잡초 같은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겨자는 불임을 치유하는 약재나(합환채, 30,14-17), 양념으로도 사용된 유익한 식물이기도 하지만, 겨자풀은 정원에 심을 만큼 보기에 아름다운 것도, 향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겨자씨는 일단 심겨지면 즉시 싹이 트고 빠르게 번식하여 겨자를 제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는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새가 깃들 정도의 큰 나무가 된다는 놀라운 대변환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비유를 들은 청중은 처음에는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표현 때문에,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백향목(에스겔 17,22-23), 혹은 이집트와 앗시리아 같은 제국을 상징하는 레바논의 송백나무(에스겔 31,2-3), 바빌론 제국을 상징하는 세상 한 복판에 서 있는, 키가 하늘까지 닿았고 땅 끝 어디에서나 보이는 굉장히 큰 나무(다니엘 4,10-11)를 상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당시의 제국을 상징하는 백향목(키가 최대 40미터까지 자라고 수령이 2000-3000년이나 되는 것들도 있음) 같이 우람하고 장대한 나무가 아니라, 겨자풀에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초점은 하늘나라가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론, 로마 제국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영웅적 통치자가 군사력과 폭력으로 백성을 억압하는 계급사회가 아니라, 겨자처럼 볼품없는 잡초 같은 사람들도 사람 대접받는 평등사회가 하늘나라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유연구자인 버나드 스캇은 겨자씨 비유에는 해학적인 비꼼의 칼날이 숨겨져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옛 제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제국으로 상상한 사람들, 멸망한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는 것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실망과 경멸을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누룩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보이지 않게 세상에 스며들어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교훈적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누룩이 고대세계에서는 도덕적 타락의 은유로 사용될 때가 많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부패한 시체가 부풀어 오르듯 발효된 반죽도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누룩 없는 빵은 거룩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었고, 무교절 축제인 유월절 축제 기간 동안에는 누룩이 든 빵을 집에서 깨끗이 치워야 했습니다(12,15).

신약성경에서도 누룩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예가 몇 군데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8,15). 마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그들의 가르침으로(16,12), 누가는 그것을 그들의 위선으로 보았습니다(12,1).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5,9),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을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 음행하는 사람들을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고전 5,6-8).

 

그러니 누룩이 부정적으로 이해된 배경에서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누룩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살짝 섞은 사람이 익명의 어떤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집에서 밀가루 반죽으로 빵을 만드는 일은 당시 가부장 사회에서 전적으로 여성에게만 맡겨진 일이었기에, 여자가 등장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불결하게 여겨진 누룩과 당시에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여자가 바로 하늘나라 비유와 결부되었다는 것이지요.

 

가루 서 말은 약 50파운드의 밀가루인데, 이 정도면 대략 100여명의 사람들에게 적당한 분량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밀가루 서 말을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단지 많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 장막 어귀에 앉아 있는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들이 방문합니다. 그들을 맞이한 아브라함은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의 아내 사라에게 말했습니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18,6). 낯선 손님 접대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밀가루 서 말은 단지 밀가루의 분량이 아니라, 이삭의 탄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누룩의 비유도 초점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점차 깨닫게 됩니다. 이 비유의 뜻은 처음의 보잘 것 없음과 마지막의 창대함의 대조적 비교가 아니라, 하늘나라는 누룩처럼 불결하다고 배제되고, 여자처럼 차별받는 사람들의 부엌, 곧 일상생활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누룩의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패의 상징인 누룩은 결코 하나님나라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누룩과 여인, 다시 말해 누룩 없는 빵처럼 거룩하고 구별된 사람들이 아니라, 타락하고 소외당하고 차별받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하늘나라가 은폐된 현재로서 이미 임재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늘나라는 누룩 없는 빵이 아니라, 오히려 누룩 있는 빵이고,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의 나라이고,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들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들어가는 나라이고, 거룩과 속됨의 경계가 제거된 나라이며, 가부장이 아니라 어떤 여자이고, 특별한 날이 아니고 일상이며, 적은 양의 밀가루로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곳이고, 백향목 같은 웅대한 나무가 아니라 겨자풀인 것이지요.

 

2. 그러나 그런 하늘나라, 아무나 차지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도, 후회가 없는 보물, 좋은 진주와 같기 때문이지요(13,44-46).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좋은 진주의 비유는 발견의 큰 기쁨을 의미합니다. 발견된 하늘나라가 주는 기쁨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 조금 떼어내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한번 하늘나라를 맛본 사람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지요.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것을 값비싼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이 모든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그러자 라고 대답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13,51-52).

 

이 말씀은 공자의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균형 잡힌 지식인은 옛 것을 익히고 미루어 새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제자들이 옛 율법을 익히는 것은 물론,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선포되고, 또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실현된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을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받은 율법학자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율법학교에서 정식으로 교육받지도 않은, 못 배운 갈릴리 어부들을 감히 율법학자라고 부르신 것이지요. 아마도 청중 가운데는 진짜 율법학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학교를 졸업하고, 율법을 가르치면서 먹고 사는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격분했을 것입니다. 율법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한 갈릴리의 어부들을 감히 율법학자라고 자기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이 사뭇 못 마땅했을 것입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율법학자는 모든 조상의 지혜를 찾고, 예언을 공부하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 유명한 사람들의 말씀을 보존하고, 여러 격언의 뜻을 절절이 꿰뚫어 파악하는 사람, 금언의 숨은 뜻을 캐고, 수수께끼 같은 격언을 쉽게 풀이하는 사람, 벼슬에 올라 군주들을 섬기고 통치자들 사이에서 중책을 맡는 사람입니다(집회서 39,1-4).

 

그렇다면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을 이런 율법학자들로 만들려고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혜를 공부하여 벼슬에 올라 군주들을 섬기고 통치자들 사이에서 중책을 맡아 자기도 통치하는 관료 같은 율법학자들과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받은 율법학자를 대립시키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의 양편에 앉게 해달라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의 부탁에,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20,25-28)고 말씀하신 분이, 자기 제자들을 관료나 바리새파 율법학자로 만들려고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받은 율법학자인 예수님의 제자는 남을 통치하거나 지배하기 위해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섬기기 위해 배우는 사람입니다. 제국의 궁전을 짓는데 사용되는 백향목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잘 자라고 넓게 퍼지는 겨자 풀 같은 백성, 부패한 사람들이라고 혐오 받고 차별받지만,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 큰 빵을 만드는 누룩 같이 보이지 않는 백성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받은 율법학자이지요. 숨겨 놓은 보물,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는 상인 같은 사람, 이 길이 참된 길이라고 생각되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올인’(All-in)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지요.

 

3.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나라에서는 누가 주인인지, 이제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13,51). 옛 것을 전적으로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제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은 세상과 다르게 현실을 보는 사람들,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을 박해하지요. 심지어는 그들을 살려두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셨고(13,54-57), 마침내 십자가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양비론이나,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양시론의 입장을 취하셨다면,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할 일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할 때에는 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5,37)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자기 안위, 혹은 손익계산을 염두에 둔 기회주의이고, 그 외의 다른 말로 장황하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궤변(詭辯)일 수 있기에 악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지키고 행했기 때문에, ‘아니오를 분명하게 했기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리새파 가운데 바리새파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도 같은 바리새파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로 바울은 마치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8,36). 그러나 그는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8,38-39), ‘환난과 곤고와 박해, 굶주림과 헐벗음, 위협과 칼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8,35).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역경보다도 강합니다.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고 7년 동안이나 일을 했으나,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칠 년이라는 세월이 마치 며칠같이 느껴졌던 야곱의 인간적 사랑도 그럴진대(29,20), 하물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넘기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사랑을 실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5,8).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분의 사랑을 도대체 그 어떤 사랑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5,10).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포로 된 사람들이 해방되고, 눈먼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되고, 억눌린 사람들이 놓임 받는데서’(4,18)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데서 실증됩니다(4,31-41).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부정하다고 배제당하고 차별당한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는데서(8,40-48), 유대인들이 개만도 못하게 여긴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하는데서(15,21-28),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십자가에 넘겨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에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노예나 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10,12).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증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멸시와 버림, 굴욕과 고문을 허용하는 것’(53,3-7), ‘모든 것을 잃으려는 의지, 체포당하고 고통 받는 것,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것까지도 견디는 것’,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랑을 의미했습니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요일 4,10).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에 있는 우리를 다시 이어준 것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 것’(요일 4,18)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성도 여러분,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고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도 비록 속으로 신음하고 있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을 힘입어(8,26-27),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힘입어(8,37), 세상을 이깁시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예배일 절기 설교제목 설교자
490 2025-05-11 부활절 넷째 주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임영섭 목사
489 2025-05-04 부활절 셋째 주일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김진 목사
488 2025-04-27 부활절 둘째 주일 복음의 대가 임영섭 목사
487 2025-04-20 부활주일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임영섭 목사
486 2025-04-13 종려주일 장애를 가진 하나님 임영섭 목사
485 2025-04-06 사순절 다섯째 주일 이웃을 위한 향유 임영섭 목사
484 2025-03-30 사순절 넷째 주일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임영섭 목사
483 2025-03-23 사순절 셋째 주일 새 이스라엘의 사명 임영섭 목사
482 2025-03-16 사순절 둘째 주일 전력을 다한 달음질 임영섭 목사
481 2025-03-09 사순절 첫째 주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임영섭 목사
480 2025-03-02 주현절 여덟째 주일 산 아래로 내려가라 임영섭 목사
479 2025-02-23 주현절 일곱째 주일 하나님이 나를 앞서서 보내셨다 임영섭 목사
478 2025-02-16 주현절 여섯째 주일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 임영섭 목사
477 2025-02-09 주현절 다섯째 주일 내가 만난 주님 임영섭 목사
476 2025-02-02 주현절 넷째 주일 사랑의 씨앗 임영섭 목사
1 2 3 4 5 6 7 8 9 10 ... 33
전체 메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