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넷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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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하나님을 시험한 아브라함
성경구절 창세기 22:1-14/ 로마서 6:22-23/ 마태복음서 10:40-42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6-28
전주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J. S. Bach)
찬양1부 주 찾으라(J. Southbridge)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위대하신 주님(R. Diggle)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전능하신 주 하나님 영원히 인도하소서(J. Hughes)
후주2부 전능하신 주 하나님 영원히 인도하소서(J. Hughes)
성경본문 창세기 22:1-14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로마서 6:22-23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마태복음서 10:40-42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1.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시각에서 해석되었습니다. 첫째는 어린이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가나안의 인신(人身)제사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Baal)과 다곤(Dagon), 몰렉(Molech) 등의 우상을 숭배했는데, 페니키아인들이 믿었던 몰렉에게는 인간, 특히 어린 아이들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거대한 청동으로 지어진 몰렉 신상은 손바닥을 펴고 있는데, 그 몸의 한 가운데 있는 아궁이를 통해 손바닥을 불에 달군 다음, 페니키아 시민들의 맏아들들을 갓난아기일 때 산 채로 몰렉 신상의 손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때 아기는 타 죽으면서 굴러 떨어져 아궁이로 들어가고 아기의 비명과 부모의 울부짖는 소리를 지우기 위해 엄청나게 큰 북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페니키아인들의 풍습은 그들이 세운 지중해 전역의 도시들에도 존속되어 카르타고 시민들은 전투에서 대패하자 300명의 귀족 아기들을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이런 잔인한 종교적 관습은 잉카, 아즈텍, 인도와 중국 등에서도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영향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사사 입다가 자기 딸을 희생 제물로 바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암몬 족속과 전투를 하면서 사사 입다는 승전할 경우, 돌아오는 길에 자기를 가장 먼저 맞으러 나오는 사람을 제물로 바칠 것을 서원했다가, 불행하게도 자기 무남독녀를 바친 비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사사기 11,30-40).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원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인류의 종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지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은 (생명)살림을 원하시지, 죽임을 원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그들이 정착한 가나안 땅에서 시행되던 인신제사 때문에 당황했고,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를 통해, 이 문제에 답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레위기에서는 몰렉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할 것이 법제화되었습니다(20,2-5).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창세기 저자 자신이 이 이야기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22,1). 아브라함은 그가 백 살의 나이에(21,5), 그의 아내인 사라가 아흔 살이었을 때 얻은 외아들을(21,5) 과연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하나님이 시험한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으며, 신앙은 곧 순종하는 것임을 드러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11,19).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이삭을 바치려고 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승하고 있는 창세기 저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아브라함의 내적인 마음,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신이니, 설령 이삭을 죽여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아니면 아내 사라가 또 다른 아들을 낳을 수 있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들은 후, 모리아 땅을 향하여 사흘 길을 걷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온갖 질문과 그가 가졌을 회의와 번뇌와 고통과 절망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일흔다섯의 나이에 아내 사라와 함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12,2)고 약속하신 하나님, 그 약속, 25년 동안이나 지연되다가, 마침내 100세의 나이에 그에게 주신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니, 도대체 이런 하나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고향에서 자기를 불러내 모든 과거와 현재로부터 떠나게 했던 하나님이 이제는 유일한 후계자, 외아들 이삭을 통해 이루어질 모든 미래를 파괴하시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일 이것이 자신의 신앙과 충성심을 알아보기 위한 교육적인 시험이라고 한다면, 이건 너무나 냉혹하고 파괴적인 시험이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를 전승하는 창세기 저자는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성소를 향하는 길 위에서 사흘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이 모든 내적 갈등, 분노, 절망과 같은 심리적인 변화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키고,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곳으로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22,3). 아브라함의 복종은 확고했고, 일시적인 동요도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확고함은 이삭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었을 때에도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애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고 대답하고 걸어갑니다. 장작을 짊어지고 걸어갔을 나이라면, 이삭은 아주 어린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결심했으면서도,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렇다면 거짓말일까요? 아니면, 아브라함은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을 하나님이 손수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진실로 그렇게 믿었던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삭도 하나님께서 손수 주신 것이니, 이삭을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절망 끝의 어쩔 수 없는 긍정이었을까요?

 

창세기 저자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침묵 속에서 다시 함께 걷습니다(22,8). 마침내 성소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놓은 다음,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고 손에 칼을 들고서 이삭을 잡으려고 합니다.

 

2. 도대체 이런 단호함,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아브라함의 단호함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시험이라고 해도 그렇지, 하나님이 어떻게 외아들을 죽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아브라함은 불가해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단 말인가!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1843년에 발표한 저서, ‘두려움과 떨림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에 전율(戰慄)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누가 보더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에게도 어긋나며, 반윤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살인자, 혹은 비속살인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범죄가 신앙의 행위로 정당화되고, 이런 범죄자가 어떻게 믿음의 영웅으로 칭송될 수 있단 말일까요?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윤리적 의무를 무한히 체념하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관계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제약하는 윤리적 의무를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영웅적 비약은 너무나 높은 경지여서 이 기막힌 비약 앞에서 뭇사람은 한없는 두려움으로 전율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신앙이 현실과 충돌할 때, 아브라함은 신앙을 선택했고, 그것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범인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브라함의 다른 모습 때문에 전율했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데리고 간 자기 종들에게 한 말에 놀랐습니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돌아올 터이니, 그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2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혼자 돌아올 것이 분명한데, 왜 아브라함은 우리가 함께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모든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이미 드러난 재미없는 드라마, 혹은 이스라엘에서의 인신제사 종식에 대한 원인론적 설화로 끝났을 것입니다.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22,3). 아브라함의 행동은 단호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일을 시작하셨으나,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가? 25년 동안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다가 겨우 외아들을 주셨는데, 이제 그 아들을 다시 취해 가신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고 그러신다는 말인가? 이삭은 단지 아브라함의 한 아들이 아니지 않은가! 이삭은 그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현현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구원사를 이제 스스로 끝장내시려고 하는 것인가?

 

이제는 아브라함의 이런 질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딜렘마에 빠지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시험에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흔들렸으나, 확고한 아브라함의 결단에 이제는 하나님이 시험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주저함 없이 손에 칼을 들고서 이삭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불렀다고 합니다(22,11). 이제 다급해진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상황이 얼마나 긴급했으면, 하나님이 두 번씩이나 이름을 부르셨겠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불타는 떨기 나무에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두 번 부르셨고(3,4),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울을 두 번씩이나 부르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이 의심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그가 일단 결단하고 순종하자, 그 때부터는 하나님이 다급해지신 것이지요.

 

3. 시험은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떠보는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시험하셨습니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시면서 자기 백성을 단련시키신 것은 나중에 그들이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고(8,16), 하나님의 시험은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시기 위한 것(66,10)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증언합니다(1,1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자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면서(17,2), 모세와 주님에게 대들었다고 합니다(17,7). 악마도 예수님을 돌로 빵을 만들라고 시험했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16,1).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모두 초능력과 이적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저자는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1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했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소유 모든 것, 아들 이삭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것, 스스로 쌓은 인간적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이해하는지, 그래서 그 선물을 언제든지 다시 하나님께 돌려 줄 수 있는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으로 상징되는 약속의 선물을 참으로, 그리고 오직 선물로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의 죽음으로 파기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림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네가 이렇게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친히 맹세하십니다’(22,16-17). 새번역은 친히 맹세하셨다고 했으나, 개역개정은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외에 맹세할 대상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맹세에 스스로 책임을 지신다는 결의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 아니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약속을 파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순종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한 것은, 바로 이런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 그에게 허락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것을 다시 취하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주는 데 있어서나, 빼앗는 데 있어서 자유로우시다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져가신다면, 아무도 도로 찾을 수 없으며, 감히 그에게 왜 그러시냐고 할 수 없다는 것(9,12)!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22,18)는 약속을 갱신하십니다.

 

4. 그러나 믿음은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시험을 이겨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받기 전에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기근으로 시험을 받아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했고,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크고 작은 시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에서 단 한번 결정적인 시험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크고 작은 시험을 받으면서,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고, 회의도 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 기뻐하기도 한, 수많은 신앙체험들이 모이고 쌓여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받고, 또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하나님의 침묵을 참으면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작은 체험들이 모이고 쌓여서 된 것이지요. 기도하고 응답받는 길 외에, 그 어디에서 우리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모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가뜩이나 줄어드는 신도수의 감소는 더 가속화될 전망이고, 교회재정상태도 악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재앙만이 아니라, 새로운 은혜의 시간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스크를 하니 쓸데없는 말, 남을 헐뜯는 뒷담화도 덜하게 되고,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하게 되고,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니 감사한 일이지요. 언제든지, 누구에게서든지 감염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겸손해지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하게 해주니 고맙기도 하지요. 코로나 시대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궁극적으로 숙고하게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비드-19 때문에, 어렵다고, 위기라고 스스로 위축되어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진정한 신앙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시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급해진 하나님 자신이 나서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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