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여섯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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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야
성경구절 이사야서 6:1-8/ 고린도전서 15:1-11/ 누가복음서 5:1-11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2-10
전주 주여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J. A. Guilain)
찬양1부 주 여호와여 찬양하오니(Fr. Jos, Schuetky)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세상에 외친다(J. P. Schulz)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전능하신 주 하나님 영원히 인도하소서(J. Hughes)
후주2부 전능하신 주 하나님 영원히 인도하소서(J. Hughes)
성경본문 이사야서 6:1-8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고린도전서 15:1-1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드린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누가복음서 5:1-11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밀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1.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처음으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전승되고 있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마 4,18-20: 막 1,16-18)고 매우 짧게 보도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시몬 베드로의 부르심과 관계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 하나를 덧붙여 전승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서쪽에 위치한 작고 비옥하며 인구가 밀집된 지역의 헬라식 이름인 게네사렛에 두 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들 가운데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을 그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반응은 이상합니다. 기적을 베푼 예수님에 대한 놀라움이나 감사의 표명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 자리에서 왜 베드로는 이런 반응을 했을까요?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호칭이, ‘선생님’에서 ‘주님’으로 바뀐 것에 주목,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의 초대교회 상황을 반영하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신적 존재인 그리스도의 현현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른 추정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경험에 반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가 잠시, 의심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자기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눅 4,38-39),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추정들에도 불구하고 왜, 베드로가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 떼를 건져낸 사건이 일어난 후, 베드로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했고, 두려워하는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는 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을까요?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직업이 더 매력적이었을까요?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 이것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일이다. 제자직은 의미심장한 것을 실현해 줄 것 같은 인생의 프로그램이 아니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와 이상도 아니다. 제자직은 인간이 생각하기에 그 어떤 것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바쳐서라도 획득할 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에서 떠나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로, 전망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생활에서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우연한 생활로, 들어간 것일까요?

 

베드로의 이런 변화의 모멘텀은 무엇이었을까요? 누가가 덧붙인 보도에 의하면,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눅 5.9-10)고 하는데, 이적 체험이 불신앙에서 신앙에 이르는 모멘텀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말씀,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라’는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갈릴리 바다 깊은 곳, 깊이를 잴 수 없고 어두운 바다 속 깊은 곳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가본 적이 없고, 다다를 수 없는 심연이지요. ‘깊은 곳’, 그곳은 단지 바다 속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이 아닐까요! 감히 대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 참기 어려운 고통,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모순, 가능성으로서의 죄와 벗어나기 어려운 악의 유혹, 자기포기와 파괴본능, 독일계 미국 신학자이자 종교사회주의자, 문화신학자로 알려진 파울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말한 경험,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의 ‘깊은 강’(1993년)이 그 곳이고, 도스토옙스키(Dostoevsky, 1821-1881)의 ‘악령’(1873년)이 그 것이지요. 실존적 불안과 공포와 전율로 끝없이 가라앉는 곳, 그 곳이 깊은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대면하고 싶지 않은 자기를 알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기 죄, 혹은 악의 가능성에 전율하는 깊이의 차원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잘 정돈된 것처럼 보이는 삶의 표면 아래,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이해되지 않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원초적인 삶의 고통이 있는 곳, 그곳이 깊은 곳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을 때, 그는 자기 영혼의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고, 그 심연에서 죄인인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기, 아니 보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했던 자기를 본 것이지요. 씻은 그물을 다시 바다 깊은 곳에 내리는 행위는, 일상의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투신, 안전한 현재에서 불안한 미래에로 발을 딛는 것입니다. 그 깊은 곳에서 베드로는 고기를 들어 올린 것이 아니라, 죄로 죽은 자기를 들어 올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이지요.

 

그러나 깊은 곳, 그 곳에서 죄로 죽어 있는 자신과 대면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오직 무덤이 있는 곳이어야만 부활이 있다.’ 니체(Nietzsche, 1844-1900)의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이어야만 은혜가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롬 5,20)고,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한다’(고전 15,36)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고, 거기서 죄인인 자신을 본 것입니다.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힌 그는, ‘주님,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고 하십니다.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의 변화 사이에 있는 모멘텀은 베드로가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고, 바닥이 없는 삶의 깊은 곳에까지 내려가지 않고서는 결코 끌어 올릴 수 없는 것이 새로운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한 번도 그물을 내려 본 적이 없었던, 그렇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고, 거기에서 죄인인 자신을 보았고, 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2. 사도 바울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한 어두운 과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자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가두고, 박해한 깊은 어둠에서부터 빛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부르심을 받은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자’(고전 15,8),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도’(고전 15,9)라고 스스로 칭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실상 조산아였던 신체적 특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도들 가운데 가장 하찮은 존재임을 밝히는 그의 겸손의 표현입니다.

 

어제의 박해자를 오늘의 사도로 부르시고, 내일의 순교자로 만드신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놀라운 선교활동에서 입증되었습니다. 그는 그 어느 사도들보다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3-29).

 

그러나 바울은 자랑하기 위해 자기가 당한 고난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이 모든 시련과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임을 밝히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그의 약점들을 자랑합니다(고후 11,30).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들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한다고 합니다(고후 12,9-10).

 

약한데서 완전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삶의 깊은 곳에서 체험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해지는 믿음, 고통스러울 때 오히려 커지는 기쁨을 그는 그의 사도로서의 고난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길어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주전 8세기, 유다의 왕 웃시야와 히스기야의 서기관이었던 이사야가 예루살렘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웃시야 왕(주전 794년-742년/ 52년간 재위)이 죽던 해(주전 742년),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서 있었고, 그들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스랍들이 우렁찬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사야는 부르짖습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그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그의 입에 대며 말합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예언자도 부정한 백성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그의 입에 대고 그의 악을 사라지게 하고, 그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그를 부정한 백성 가운데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를 부정한 백성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예언자는 처음부터 초월적인 기원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 입술이 부정한 자기 백성을 규탄해야 하는 예언자의 운명을 받아드렸습니다.

 

거의 반세기 이상을 재위한 유다 왕 웃시야 치세는 유다 역사상 유래 없는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그는 앗수르와 이집트의 세력이 약화된 틈새에서 국방, 정치, 경제(농업과 국제무역)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에시온 게벨이라는 항구를 장악하고 국제무역에 뛰어들어 많은 사치품을 수입하였고(이 3,17-4,1), 수출농업을 크게 장려하였습니다(대하 26,10). 농업생산품을 수출하고 그 대신에 왕실과 지배층들의 사치품과 군수물자들을 수입했습니다. 이런 수출농업정책은 거대한 대토지소유자들의 출현을 초래하였고, 농사짓는 이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원칙에 의해 유지되던 유다의 계약 공동체적 우애를 파괴했습니다. 토지를 빼앗긴 소작인들과 대토지 소유자들 사이의 양극화가 극심해진 것이지요. 백성의 장로들과 지도자들은 ‘주님께 반역하는 도둑의 짝이었습니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렸습니다.’(이 1,23).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해서, 자기 집을 가득 채웠고,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치 맷돌질하듯 짓뭉갰습니다.’(이 4,14-15).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불순물 찌꺼기로 은화를 만들고, 포도주에 물을 섞어 팔았습니다(이 1,22). 이웃들이 서로 싸우고, 젊은이가 노인에게 대들고, 천한 자가 존귀한 사람에게 예의 없이 대했습니다(이 4,5). 우상숭배와 사치도 극에 달했습니다(이 1,29: 이 4,18-23). 이런 상황에서 웃시야 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유다 국운의 몰락과 쇠퇴를 예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북쪽의 앗수르 제국이 제국주의적 정복전쟁을 남서쪽으로 확대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정복 군주인 디글랏빌레셀 3세는 북시리아 지역의 소왕국들을 다 정복하고 팔레스타인 소왕국들도 강제 병합, 무거운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때 북이스라엘은 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반 앗수르 연합전선에 남왕국 유다의 참전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남왕국 유다는 동맹을 거부하고, 분개한 북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를 공격합니다. 내전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유다 왕 아하스는 형제국인 북왕국 이스라엘과 전쟁을 위해 앗수르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사야는 지금은 앗수르가 유다를 도와 북이스라엘을 치겠지만, 앗수르는 유다의 해방자가 아니라 정복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사야는 약 40년간(주전 740년부터 701년까지) 지속된 유다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 공평과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이상 세계의 도래를 예언했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위경인 ‘이사야의 승천’에 의하면 이사야는 온갖 우상숭배를 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여 예루살렘이 죽은 이들의 피로 흠뻑 젖게 한(왕하 21,16) 므낫세 왕 치세 동안에(주전 696년-642년) 통나무 안에서 톱으로 몸이 절단되는 참사를 당했다고 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비록 주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았지만,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이 6,8), 응답하지 않거나 못들은 척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했던 모세나 예레미야와는 달리,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이 6,8)라고 선뜻 나설만큼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4. 왕궁 서기관이었던 이사야를 예언자가 되게 한 것, 어부였던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 것, 교회를 박해하던 바리사이파 유대인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게 한 것,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둡고 깊은 개인적 혹은 역사적 상처가 주는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않고,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깊은 곳에서 자신의 죄를 대면하지 안했다면, 이사야는 여생을 왕궁서기관으로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로 남았을 것이고, 바울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요 그리스도인 박해자로 이름을 떨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이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변화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뜻과 계획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변할 수 있기에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온 실존적 터전이 흔들릴 때, 비로소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기에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자아와 세상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과 대면할 수 있는 힘도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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