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다섯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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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
성경구절 이사야서 40:25-31/ 고린도전서 9:16-23/ 마가복음서 1:29-39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2-07
전주 주님께 기도하나이다(F. Hiller)
찬양1부 내 맘에 한 노래 있어(P. P. Bilhorn) 특송: 유희업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하나이다(L. Mason)
후주2부
성경본문 이사야서 40:25-31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9:16-23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서 1:29-3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1. 2 이사야 예언자는 정치적 사건과 종교적 사건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배재한 비종교적인 역사 이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사건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결코 분리시켜 해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오랫동안 정교분리(政敎分離)논쟁이 있었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하고,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교분리는 사실 그렇게 오래 전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주후 3세기, 그리스도교가 국가 종교가 된 이래, 서구에서는 정교일치의 관계가 거의 2천 년 동안 유지되어 왔습니다. 서방교회에서는 교회가 정치권력을 지배했고, 동방교회에서는 교회가 정치권력에 예속되는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념적으로는 권력과 신앙, 제도적으로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엄격한 분리가 형성된 것은 미국 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 현세적 생활에 관여하고, 교회(종교)는 인간의 내면적, 신앙적 생활에만 관여해야하고, 서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제도화된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정교분리는 정치권력의 종교에 대한 불간섭이 아니라,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70년대 개발독재의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할 때, 정부가 정교분리론을 가지고 했다는 것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현실에 무관심하고,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등장하는 기독교 이름을 붙인 정당들도 있고, 정치인들보다 더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정교유착적인 교회와 종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교분리는 더 이상 교회가 정치적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비정치적이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정치적이냐의 문제일 뿐이지요. 물론 모든 인간적 행동을 다 정치적 행동으로 환원시키거나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이고, 정치적 무관심도 일종의 정치적 행동입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어떻게정치적인지 다를 뿐이지요.

 

주전 5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제2 이사야도 권력자의 눈에 정치적 인물로 비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가들과 부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아부하거나, 그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사익을 챙기는 그런 의미의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2 이사야는 자기 백성의 죄악을 규탄하고, 지도자들의 우상숭배와 권력숭배, 부정부패와 불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었습니다.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입김을 부시면 금방 마르고 시드는 풀에 지나지 않고(40,7), 뭇 나라들은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이며(40,15), 통치자들은 강풍에 날리는 검불에 불과한 존재입니다(40,24). 하나님의 계획과 행위에서 주변 제국들은 전혀 중요한 요인이 못되고, 이 세상의 나라와 권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40,17).

 

그렇게 확신하는 예언자가 어찌 백성이나 권력자의 눈치를 보겠습니까! 2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창조하셨고,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시는 분(40,26), 땅 끝까지 창조하신 영원하신 주님,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고,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40,28)입니다. 바벨론에서 별들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고의 신()들이며, 마르둑은 태양신이었고, 왕은 그의 사제요, 지상에서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리고 별 숭배 제의는 바벨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2 이사야는 그런 별들이 하나님의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며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40,26). 이런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예언자가 어떤 제국인들 두려워하겠으며, 어떤 우상인들 무서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나라는 완전히 망했고, 바벨론 유배지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기약 없는 해방과 귀향을 기다려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불평하며, 주님께서는 자기 사정을 모르시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시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40,27). 야훼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으로서 자기 백성을 위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에 대한 의심과 절망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지요.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50여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낯선 나라, 척박한 땅에서 포로로 지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과 귀향에 대한 희망이 여전히 살아 있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2 이사야는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았으니,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고 선포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합니다(40,2-3).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리신다.’(40,10)고 위로합니다. ‘영원하시고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주님께서 오시면,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40,28-31)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에게 주님은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권력을, 제국을 소망으로 삼는 이들은 비록 젊은이거나 장정일지라도 피곤하여 지치고 맥없이 비틀거릴 것입니다(40,30).

 

2 이사야는 서로 다른 곳에 소망을 두는 두 집단을 날카롭게 대립시킵니다. 강하고 힘이 넘치는 사람은 오히려 쓰러지지만, 지치고 탈진한 사람들은 갈 길을 갑니다. 이런 역설, 이런 뒤집힘, 이름 없는 약한 민족이 일어나고, 강대한 제국이 쓰러지는 뒤집힘이야말로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마리아가 찬미한 하나님은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는 분,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시는 분입니다(1,52-53). 우리는 멀리는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 제국들의 역사 속에서, 가까이는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을 기도로 얻은 한나도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시는 분,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 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했습니다(삼상 2,6-8).

그렇습니다.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을 하나님은 반드시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새 생명을 주십니다.

 

2. 우리는 신약성경에서도 주님을 소망으로 삼았던 한 여인을 만납니다. 열병으로 누어있던 베드로의 장모이지요. 그녀의 열병이 매우 심각했다는 것은 질병에 대한 묘사에는 잘 사용되지 않았던 누워 있다는 동사에 의해 강조됩니다. 그녀는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아팠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님에게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러자 곧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1,30-31).

일으키다는 같은 단어(egeiren)를 죽은 소녀를 소생시킨 이야기(5,41-42)에서도 사용함으로써 마가는 시몬의 장모 치유이야기에서 단순한 육체적 회복만이 아니라, 부활을 상기시켰음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에서 드러난 일으킴의 능력은 후에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앞당겨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구원은 결코 영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마음의 평안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신체적 영역에서 구체화됩니다. 치병과 귀신축출, 곧 치유와 마음의 평안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 치유 이야기에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무슨 특별한 말씀이나 기도를 하셨다거나, 특별한 치유 방법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사정을 들으신 주님은 그녀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을 뿐입니다. 치유는 주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 일으키실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내민 주님의 손을 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없거나 용기가 없어서 예수님의 손을 잡지 못합니다. 몰트만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약속에 합당한 존귀한 존재로 여기셨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이 다시 창조될 것을 약속하셨지만, 인간은 마치 모든 것이 옛날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그가 행하지 않는 선이며, 그의 악행이 아니라 그의 태만이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약함, 소심, 낙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치유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내민 예수님의 손을 담대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님은 아주 이른 새벽, 오전 3시부터 6시 사이에,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1,35).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쉬지 않고 기도하셨고, 또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1,35; 5,16). 새벽기도는 본래 도교 도사였다가 후에 목사가 된 길선주 목사에 의해 도입된, 한국교회 고유의 기도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새벽기도의 창시자였던 셈이지요.

예수님은 주변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을 멀리하고 기도하러 산으로 홀로 가시어’(6,46; 14,23)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6,12). 기도할 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골방에서 해야 하며(6,6),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한다.’(6,7)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22; 11,24).

,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9,29)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 했습니다(마가 14,38).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과부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재판관에 대한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18,1).

예수께서는 원수와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셨고(5,44; 6,28),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안수하고 기도해주셨으며’(19,13-15), 베드로가 시험을 받을 때에 그를 위해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기도하셨습니다(22,32).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고민하고 슬퍼하며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기도하셨습니다(26,36-39).

 

쉬지 않고, 홀로, 새벽에, 산에서, 엎드려 기도드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모든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병과 귀신축출의 능력은 기도에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도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5,15)이라고 믿었고, ‘고난 받는 사람은 기도해야 하고, 즐거운 사람은 찬송해야 한다.’(5,13)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체험하지도 못할 놀라운 환상과 계시들을 받았습니다. 그는 살아서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낙원에 이끌려 올라간 바울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고후 12,2-4).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한 것이지요. 게다가 바울은 몰타 섬에서 열병과 이질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던 보블리오의 아버지와 다른 많은 환자들을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해주었습니다(28,8-9).

그러나 정작 바울 자신은 자기 몸에 가시 같은 지병(持病)으로, 스스로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표현한 병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이 병이 떠나게 해 달라고 바울은 세 번이나 하나님에게 간청했으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8-9)고 말씀하십니다.

 

약한 데서 완전해지는 하나님의 능력,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강한 데서 완전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마음의 교만함을 제어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는 자신의 병약함을 자랑하고,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약한 데서 완전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기에, 바울은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고전 9,19).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고,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고,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다는(고전 9,20-22) 바울의 주장은 기회주의적 적응주의자의 변명이 아닙니다. 그의 변신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향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고전 9,22).

 

그렇다면 바울의 변신은 무죄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9,23).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권력에 소망을 둔 사람이 아닙니다. 부침하는 권력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권력지형의 변화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립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주님이 그들을 허수아비로 만드실 때, 그들도 강풍에 날리는 검불처럼 날아갈 것입니다(40,23-24). 재물을 소망으로 삼고 부당한 이득을 탐하는 사람은 재물이 목숨을 빼앗을 것입니다(1,19). 자기 육체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마른 풀처럼 육체가 스러져갈 때, 함께 시들 것입니다(40,6-7).

 

그러나 예언자 제2 이사야는 바벨론 유배지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으로 삼았고, 열병으로 죽어가던 시몬의 장모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고전 9,23), 자기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자유를, 자기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겨레와 인류의 구원을 소망으로 삼았습니다(9,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무엇을 소망으로 삼고 살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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