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나눌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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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신명기 34:1-12/ 데살로니가전서 2:1-8/ 마태복음서 22:34-46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10-25 |
전주 | 내 주는 강한 성이요(D. Buxtehude) |
찬양1부 | 십자가 군병(C. Gounod) 특송: 안채연 교우, 임건묵 교우, 조에스더 교우, 이민준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사슴이 시냇물을(신상우 곡) 특송: 이재은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내 주는 강한 성이요(M. Luther) |
후주2부 | 내 주는 강한 성이요(M. Luther) |
성경본문 |
신명기 34:1-12 모세가 모압 평원, 여리고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에 오르니, 주님께서는 그에게, 단까지 이르는 길르앗 지방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 온 유다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에서 소알까지 평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너에게 이 땅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네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서, 모압 땅 벳브올 맞은쪽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원에서 모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이 끝날 때까지, 모세를 생각하며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 그 뒤에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모세와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를 이집트의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보내셔서,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을 하게 하셨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모세가 한 것처럼, 큰 권능을 보이면서 놀라운 일을 한 사람은 다시 없다. 데살로니가전서 2:1-8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 22:34-46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러자 아무도 예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으며, 그 날부터는 그에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
1. 오늘은 개혁교회전통 위에 서 있는 세계의 개신교회들이 16세기 유럽의 교회개혁 503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34살의 무명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M. Luther, 1483-1546)가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교황청의 ‘대사’(면벌부) 판매에 항의하기 위하여 ‘95개의 논제’를 내건 날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우리가 습관적으로 ‘종교개혁’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하게 말해, ‘그리스도교 개혁’, 혹은 ‘교회개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그리고 언제, ‘Reformation’을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학술용어가 그렇듯이, 일본을 거쳐 번역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라는 단어에는 은연중 ‘그리스도교 중심주의’ 혹은 일본 개화기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탈아입구’(脱亜入欧), 곧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일본의 유럽 지향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오늘은 ‘16세기 유럽의 교회개혁 기념주일’ 혹은 ‘마틴 루터의 교회개혁 503주년 기념주일’이라고 해야겠지요.
우리가 이렇게 부른다고 하여, 16세기 유럽의 교회개혁의 세계사적 의미가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의 교회개혁은 당시 부패한 가톨릭교회 비판과 ‘프로테스탄트’, 곧 ‘개신교’라는 새로운 교회의 탄생에 그친 것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비텐베르크의 무명의 한 수도사가 들어 올린 개혁의 기치는 고지식하고 과거에 정체된 중세에 대항한 이성의 반란이며, 무지의 어둠을 밝힌 빛이자,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연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루터의 교회개혁과 그 결과에 대한 평가가 모두 다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는 자신이 추구하는 교회개혁의 성공을 위해 황제와 교황청에 비판적이었던 지방 영주들의 비호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방 영주들도 루터의 황제와 교황청 비판이 그들의 권력기반을 넓혀주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루터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교회가 국가권력에 예속되는 것이었고, 루터교는 국가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개혁만이 아니라, 중세의 봉건질서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파 운동이 일어났고, 그 운동은 폭력적인 저항, 이른바 ‘농민전쟁’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재세례파’, ‘토마스 뮌처’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 급진적 개혁가였지요.
자기가 추구하는 교회개혁이 영주들에 대한 농민들의 반란 때문에 좌초될 것이 두려웠던 루터는 영주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학살할 것을 주문합니다. 루터 개혁이 남긴 짙은 역사적 그늘이지요. 루터가 남긴 부정적 유산은 그 외에도 전쟁과 자본의 정당화, 반유대주의, 반집시주의, 반여성주의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판자들은 루터의 두 얼굴을 말하고, 루터의 교회개혁을 미완의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운동이 순탄한 길을 걸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루터는 끊임없는 협박을 당했고, 화형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이 성공한 것은 탁월한 전략가이자 루터의 보호자였던 프리드리히 폰 작센 선제후의 도움 때문이었지만, 중세 말의 사회, 경제적 변화, 그리고 루터보다 앞선 교회개혁의 선구자들의 노력과 희생도 결코 간과될 수 없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체코의 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69-1415) 같은 인물이 그들입니다.
존 위클리프는 마틴 루터보다 130여년이나 앞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성경에 근거하여 교황제도를 부인했습니다. 교황청의 세속권한과 세속 재산에 대하여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고 하여, 그는 죽은 후, 부관참시보다 더 가혹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가 악화된 중풍으로 죽은 지 44년이 지난 1428년, 잉글랜드 교회당국은 무덤에서 그의 유골을 꺼내고 그가 범한 죄 260여 가지를 낭독한 후, 유골을 화형에 처하고, 남은 재를 모아 스위프트 강물에 뿌려, 그에 대한 기억조차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체코의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추종자로서 교회의 타락을 청산하고 초기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화형에 처해졌고, 스위스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취리히 근교 카펠에서 벌어진 가톨릭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시신이 네 갈래로 찢겨 화형을 당했습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도 화형을 당했지요.
이런 선구적 개혁가들의 희생 위에서 마틴 루터의 교회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와 동시대 인물이지만 개혁에 실패한 인물이 있습니다. 토마스 뮌처(Thomas Muentzer, 1490-1525)가 그런 사람이지요.
토마스 뮌처는 루터보다 7년 후에 태어났습니다. 후에 프로제에 있는 수도원의 수석 신부가 된 뮌처는 루터의 교회개혁사상에 매료되어 그를 추종하였지만, 사실 루터보다 먼저 교황청의 ‘대사’(면벌부) 판매를 비판했고, 루터보다 3년 앞서 독일어 예배를 도입했습니다. 그는 예배 형식도 개혁, 미사와 직제를 모두 독일어로 하였고, 라틴어로 된 시편과 찬송도 모두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지금의 독일 개신교 예배 형식과 찬송가의 모태는 사실 루터가 아니라 뮌처인 것이지요.
비범하고 열정에 사로잡힌 뮌처를 루터는 츠비카우 교회의 사제로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로 수공업자, 광부, 직조공 등 하층민으로 구성된 카타리파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가난한 서민들의 현실을 보았고, 마침내 이런 경험이 후에 그를 영주들과 루터에 저항하는 농민혁명의 지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농민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제도화된 중세 질서의 수혜자인 영주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교회개혁을 하는 루터가 점차 뮌처의 눈에는 반쪽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개혁자로 보였고, 그래서 그는 루터를 새롭게 등장한 ‘비텐베르크의 교황’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세상 권력에 대한 입장도 뮌처는 루터와 달랐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13장 1절을 근거로,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뮌처는 로마서 13장 3절에 근거, ‘권세자는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두려움이 되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그 권세를 다시 회수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뮌처는 권력을 상대화시켰습니다.
루터와의 갈등이 심화되자, 루터는 더 이상 뮌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뮌처를 ‘살벌한 예언자’라고 비난했고, 뮌처는 한 때 그가 추종했던 스승인 루터를 ‘거짓말 박사’라고 부르며, ‘영혼 없이 편하게 사는 비텐베르크의 죽은 육신’이라고 비웃었습니다.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우정과 존경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제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루터는 뮌처에게 공개적으로 적대를 표시합니다. 뮌처는 몰래 피신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독일 남부 지방에서부터 점차 북쪽으로 농민들의 봉기가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1525년 4월에는 6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무장봉기를 했습니다. 영주들의 군대도 소집되었습니다. 무장한 농민들과 함께 무지개 깃발을 앞세우고 프랑켄하우젠으로 향한 뮌처는 승리를 확신했고, 영주 측 군대와 용병들의 첫 번째 공격은 무사히 방어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센과 헤센의 제후 연합군은 새로운 공격을 시도, 마침내 6,000 명의 뮌처 추종자들은 참패를 당하고 대부분 살해당하거나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뮌처는 지붕 밑에 몸을 숨겼으나, 곧 밀고자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된 후, 헬드룽엔 성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35살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1525년 5월 27일, 농민봉기 15일 만에 농민군은 완전히 파멸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단지 교회의 개혁이 아니라, 중세 봉건사회의 억압적인 질서 자체를 개혁하려던 토마스 뮌처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뮌처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평가자의 시각에 따라 달랐습니다. 그러나 루터와 뮌처, 두 사람의 개혁운동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교회 개혁이 사회 개혁과 상보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와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성숙하게 변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요. 교회개혁이 사회변혁으로 완성되어야 하고, 교회는 세상의 변화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서 오히려 세상의 변화를 견인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개혁은 ‘자기들만의 잔치’,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수 있을 것입니다.
루터의 선구자들과 토마스 뮌처는 모세와 비슷한 인물들입니다.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보았지만, 정작 들어가지는 못한 비운의 인물이라는 점에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뮌처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땅을 보았고, 모세는 모든 인간이 해방된 땅을 보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자 모세는 40년 동안 이집트 왕자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의 목자로, 그 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말씀하신 인물(신 34,10), 이스라엘 역사 상 다시는 나지 않은 예언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들을 하신 주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큰 권능을 보이면서 놀라운 일을 한 사람은 모세 외에 한 사람도 다시 없다고 평가받은 인물(신 34,11-12), 주님께서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신 인간(출 33,11), 그러나 아무도 지금까지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신 34,6)이 모세였습니다.
토마스 뮌처는 16세기 유럽의 부패한 중세 교회의 개혁만이 아니라, 중세의 억압적인 사회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역사 속에 실패한 개혁가로 남아 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뮌처의 교회와 사회개혁 의지의 밑바닥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이 놓여 있었습니다.
2.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될 수는 있어도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마 22,36). 새번역은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로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은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무엇을 시험하려고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율법지식을 알아보려고 한 것일까요? 토라에 있는 613개의 율법들 가운데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아보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한 것일까요? 마태는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예수께서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들은 후에 그들이 모인 것으로 보아(마 22,34), 질문한 율법교사는 예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 것을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면서 물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크고) 으뜸가는 계명이다.”고 말씀하십니다(마 22,37-38).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 때에 읊는 기도,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기도,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야 할 기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고,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여야 할 기도(신 6,6-9), ‘셰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을 인용하심으로써 답변하신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신 6,4-5).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은 율법 교사는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고, 매일 드리는 기도로 답변을 하셨으니, 놀랄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평범하고 널리 알려진 답변에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토라에는 613개의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248개는 ‘무엇을 하라’는 율법들이고, 365개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율법들입니다. 율법학자는 그 가운데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하나를 제시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기본적인 계명,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도로 답변하신 것이지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그렇습니다. 가장 크고 으뜸가는 계명은 가장 작고 가장 평범한 데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데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공기와 물이 그것이지요. 다이아몬드는 그 희소성 때문에 값이 비싸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지만, 다이아몬드 없어도 사람은 평생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3분 동안만 공기를 접하지 못해도 죽고,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도 죽고, 3달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공기와 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고,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613개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실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결과이지, 하나님 사랑의 전제가 아닙니다. 못 이겨, 마지못해,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결과가 아닙니다. 누구 눈치 보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어렵지만 기쁘게 헌금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과의 약속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계명에 놀랍게도 또 하나를 덧붙이십니다.: “둘째 계명도 이와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 22,39-40).
이웃 사랑의 계명은 레위기에 나오는 계명입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레 19,18).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한 율법학자는 아마 이번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모두 다 율법에 있고, 그는 충실히 그것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같은 유대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이 이방인, 혹은 부정하다고 규정된 사람이라면 사정이 달라지지요. 예수님은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심으로써, 사실상 모든 인간을 –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정결한 인간이건 부정한 인간이건 – 몸이라는 보편성에서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몸의 경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몸의 느낌과 요구는 인종과 종교, 남녀노소, 어르신이건 젊은이건 다 같습니다. 나의 몸이 느끼고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인간은 누구나 다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사랑은 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있습니다. 몸의 구원 없는 영혼만의 구원은 있을 수 없고, 영혼의 구원 없는 몸의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과 거기에서 파생된 모든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한)하나님 사랑과 (자기 몸과 같이)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요한은 말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1서 4,20).
3.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은 가장 작은 계명인 이웃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가장 소소한 것 안에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가장 가볍게 여기는 것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몸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합니다.
교회개혁으로 번역한 ‘Reformation’은 ‘형태를 되돌림’(Rueckformung), 즉 ‘원형으로의 복원’을 의미합니다. 단어의 의미가 시사하듯이 루터는 미래를 내다본 것이 아니라, 현재보다 더 나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본래의 상태로 회귀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이지요. ‘Ad fontes’, ‘근원으로’, 그리고 그 길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에 있다는 것이 16세기 유럽의 교회개혁과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가 제창한 르네상스가 남긴 교훈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개탄하고 있습니다. ‘안티기독교 사이트’에 떠도는 글들이나 댓글들을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부끄러울 정도이지요. 시대마다 교회개혁을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가장 본질적인 길은 언제나 ‘Ad fontes’, 곧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근원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 말씀의 빛에서 우리 교회와 우리 신앙을 다시 구성(Re-formation) 하는데 길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해야 할 일은, ‘95개 테제’의 첫 번째 테제에서 루터가 말한 것처럼, 회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교회개혁은 회개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서 완성됩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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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 | 2025-07-06 |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 예루살렘에 평화가 넘치게 | 임영섭 목사 |
1301 | 2025-06-29 |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 | 임영섭 목사 |
1300 | 2025-06-22 |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 임영섭 목사 |
1299 | 2025-06-15 |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서울주교좌성당) | 누구를 위한 상속인가? | 임영섭 목사 |
1298 | 2025-06-15 |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경동교회) | 주님과 함께 춤을... | 박성순 신부 |
1297 | 2025-06-08 | 성령강림주일 | 하나님 안에서 | 임영섭 목사 |
1296 | 2025-06-01 | 부활절 일곱째 주일 | 하나님의 의 | 임영섭 목사 |
1295 | 2025-05-25 | 부활절 여섯째 주일 |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 임영섭 목사 |
1294 | 2025-05-18 | 부활절 다섯째 주일 | 하나님의 집 | 임영섭 목사 |
1293 | 2025-05-11 | 부활절 넷째 주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 임영섭 목사 |
1292 | 2025-05-04 | 부활절 셋째 주일 |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 김진 목사 |
1291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1290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1289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1288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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