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아홉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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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동족 대(對) 신앙
성경구절 창세기 32:22-31/ 로마서 9:1-5/ 마태복음서 14:13-21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8-02
전주 깊은 고난에서 주께 간구하나이다(F. Mendelssohn)
찬양1부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이동훈 곡) 특송: 정록기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내 삶의 이유라(이권희 곡) 특송: 최세정 집사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영광의 주를 다 찬양하라(J. M. Haydn)
후주2부 영광의 주를 다 찬양하라(J. M. Haydn)
성경본문 창세기 32:22-31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분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그분은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그분이,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옵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로마서 9:1-5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4:13-21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아뢰었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흩어 보내서,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물러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밖에,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1. 네 복음서 모두에 전승되고 있는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를 저는 4년 전(2016), ‘아래로부터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본문을 가지고 오늘 다시 설교를 하게 된 것인 교회력에 따라 3년 주기로 바뀌는 세 본문 성경말씀을 따르는 전통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이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4년 전, 우리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눈앞에 어른 남자만 해도 오천 명이 넘고, 어린이들과 여인들까지 셈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인데,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어떻게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감사 기도를 드리셨는지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상황은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감사하셨고, 그리고 이적은 일어났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은 믿음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오병이어의 이적 이야기를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나, 신적 능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야기로 본다면, 그것은 위로부터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이적이라면, 한 어린이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 떡 다섯 개와 소금에 절인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적이라는 의미에서(6,9), 우리는 이것을 아래로부터의 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오늘 같은 오병이어 이야기를 다른 시각에서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공관복음서 모두, 이 이야기를 세례자 요한의 처형 사건(14,1-12) 바로 뒤에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처로 맞아드린 것에 대한 백성의 비판, 특히 세례자 요한의 비판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감옥에 가둔 분봉왕 헤롯이 생일잔치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의 청을 받아드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께 가서 알려드렸는데,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고(14,13), 그 소문이 퍼지자 여러 동네에서 무리가 몰려와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 바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공생애를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면서 시작하셨고(1,14; 4,12-17), 실제적으로 요한을 계승하셨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요한을 엘리야로, 다시 말해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약속된 예비자의 역할을 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이제,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아 됨을, 다시 말해 엘리야보다 더 큰 인물임을 공적으로 드러낼 계기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오병이어의 이적 사건이 빈들’(광야)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이 일어났을 때, 곧바로 출애굽 후, 광야에서 조상들이 배고팠을 때,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백성을 먹이신 이야기와 모세를 기억했을 것입니다(16,1-36). 그리고 숫자에 대한 유대교적 의미를 알고 있는 청중들은, 곧바로 ’(5)십이’(12)에서 모세 5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532절부터 38절에 나오는 두 번째 급식 이적 이야기, 곧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남자만 사천 명을 먹인 사건도 상징적입니다. ‘’(4)땅의 사방’(11,12; 7,1), 다시 말해 온 세상,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하는 지구 전체를 의미합니다. 숫자 ‘7’도 상징적입니다. 일곱 개로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는 것도,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상징성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유대 민족은 일곱 개의 이방 제국의 지배 아래 살아왔습니다.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시리아, 로마 제국이 그들입니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유대 민족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서 숫자 ‘7’은 세상의 이방 제국 전체를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급식 이적 이야기는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엘리야와 모세에 관한 기억에 연결함으로써,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인 엘리야와 모세보다 더 위대한 메시아임을 증언하는데 초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현현으로 이해된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함께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백성을 구하신 예수님은 엘리야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광야에서 만나로 백성을 먹인 모세와 오병이어로 백성을 먹인 예수님, 홍해를 지팡이로 가른 모세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대조함으로써(4,22-33), 예수님이야말로 모세를 능가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복음서 저자들은 주장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보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자이며 율법수여자로서 모든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지도자였던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하고(17,1-8), 모세는 율법을 주었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고(24,44),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1,17)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더욱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이 급식이적 이야기가 모두 갈릴리 바다에서 배로만 갈 수 있는 외딴 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비교적 덜 유명한 야곱의 아들들인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에게 배정된 땅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여전히 유대인들의 땅이기는 했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분하던 경계선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땅들은 때로는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도 불리었습니다(4,15). 마태와 마가에 전승되고 있는 또 다른 급식이적이야기, 곧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남자만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도(15,32-38) 갈릴리 호수의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급식이적이야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가 이스라엘 민족의 경계와 유대인의 한계 안에 머물지 않고, 이방인들에게로, 온 세상으로 확대되는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유대민족의 예언자이자 해방자였다면, 새로운 엘리야, 새로운 모세인 예수님은 유대민족만이 아니라, 이방민족들, 아니 온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급식 이적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품이 배고픈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고(자비), 앓는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임을(치유/14,14)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구원에는 그 어떤 경계도, 한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찌 오병이어의 이적 이야기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모든 형태의 경계를 타파하시고, 한계를 모르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전통을 철저하게 고수하려는 율법학자들과 제사장 집단으로부터는 신성 모독자, 로마 제국의 총독으로부터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무신론자라는 정치범으로 십자가 죽음을 죽으셨던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지 않으셨다면(9,11),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21,31),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시지 않으셨다면(12,9-14),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을 선하다고 하지 않으셨다면(10,30-37), 유대인이 개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한 가나안 여자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시지 않으셨다면(15,21-28),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지 않으셨다면(4,3-42),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고 말하지 않으셨다면(16,23),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18,14), 포도원 일꾼들을 똑같이 대우하지 않고, 임금을 능력과 노동시간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셨더라면(20,1-16), 예수님은 배척을 당하시지도, 살해위협을 당하시지도, 고난을 받으시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십자가를 지실 일은 더더욱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사람은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건강하건 병으로 고통 받건, 선한 사람이건 악한 사람이건 모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일 뿐이고(14,14), 죄인이고, 회개에로 초대받은 사람일 뿐입니다(4,17).

 

2.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이제 단지 유대인들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물론 유대인은 사도 바울의 증언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유대민족입니다(9,4-5). 그런 점에서 유대인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비록 7개의 제국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유대전쟁 후, 마침내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2천년 동안 박해를 받았지만, 유대인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 할례, 율법, 안식일 준수, 유월절 축제 등 종교적인 특징과 메시아 대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집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던(3,5-6), 사도 바울도 육신으로 동족인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다고 고백한 것이지요(9,3). 비록 신앙에서는 서로 달랐지만, 동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울은 슬퍼했고,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었으며, 동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10,1).

 

동족, 혹은 소속 집단의 이익, 크게는 자기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사랑이 양심 또는 신앙과 충돌하는 역사적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재판의 처음부터 이미 죽음을 선택하고, 아테네의 속물적 시민정신과 다수결의 테러를 고발하면서, 사람을 죽임으로써 진리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소크라테스(주전 470년 경?-주전 399), 국회가 결의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검사에게 반문하면서, 왕의 신하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신하로서 죽음을 선택한 토마스 모어(1478-1535), 억울한 누명을 쓴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변호하기 위해 자기 조국, 프랑스를 고발한 에밀 졸라(1840-1902), ‘교회는 자신을 위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간이다. 교회는 자신의 공간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투쟁할 때만 자신의 공간을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만 투쟁하는 종교단체가 될 뿐, 하나님의 교회, 세계의 교회가 되기를 포기하게 된다.’고 하면서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인도주의와 사회는 평등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일본 내에서는 농민, 노동자, 부라쿠민 등의 권리보호를 위해 투신하였고, 한국강제병합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조선청년독립단, 1920년대에는 의열단원으로 일본 황궁의 니쥬바시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 1926년에는 천황가 암살을 기획한 이른바 대역사건의 모의로 체포된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기도 하였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1880-1953) 같은 인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 혹은 민족이나 국가가 양심과 충돌할 때, 주저하지 않고 양심의 편에 섰다가 고난 받거나 죽임당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에서는 이단아 혹은 반역자였을지 모르나, 양심의 역사에서는 진정한 애국자, 역사의 양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2천년 서구 교회의 역사는 적대자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로 점철된 범죄의 역사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유대인들과 여성신비주의자들이 멸절되어야 할 적이었고, 점차 교회의 적은 무슬림(십자군전쟁), 흑인(아프리카 노예사냥에 항거하다가 살해당한 흑인은 2억 명, 약 천만 명의 흑인노예가 아메리카에 도착), 아메리카 원주민(1억 명의 원주민 학살),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였다가, 무신론자, 마침내 동성애자까지 이르렀습니다. 적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집단, 없으면 만들어야 생존할 수 있는 집단은 병든 집단이고,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5,45),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을(5,44) 믿지 않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이지요.

 

다행이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서구 기독교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아,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이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비판과 저항, 아니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순응 사이에서 교회 자체가 갈등하고 분열하고 적대적이 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이른바 포괄적 차별금지법때문에, 좁게 말하면 동성애 문제를 중심으로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제안된 법안에 대한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토론과 팩트체크가 아니라, 온갖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가운데 진영논리와 편 가르기로 적과 아군만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 사회가 성숙하게 발전할 수 없지요. 나와 생각과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시하고,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죽으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나눈 성만찬 사귐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성만찬을 연상시킵니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나누어 주셨다는 말씀(14,19)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전승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성만찬 제정사와 같은 내용입니다(고전 11,23-26). 그러므로 성만찬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죽으심을 감사로 기억하는 상징행위이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있는 빵이신 주님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임을(6,51)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선포하겠다는 공동체적 결의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 전례는 하나님과 인간의 우주적 화해의 상징이고,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가 드러나는 공간인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1,27).

 

교회는 주후 1세기 교부들의 문헌인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를 근거로 세례 받지 않은 신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고, 이것이 교회의 전통이 되었으나, 성만찬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세례 받지 않은 신도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16세기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자인 라스 카자스(1474-1566)는 모든 교구 사제들에게 원주민의 재산과 토지를 빼앗거나, 지나치게 싼 값으로 인디언 노예를 사거나, 부당한 임금을 주었는지를 고해성사에서 묻고, 만일 그들이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잘못을 고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면죄선언을 거부하게 했습니다. 인디언도 인간이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인디언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한 라스 카자스에게 죄는 언제나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면죄선언과 성례전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거룩한 식탁은 하나님과 용서받은 죄인이 화해된 공간입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로 변하는 이곳은 세속적인 물질과 영원한 생명이 화해된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죽으신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마련하신 이 식탁에서는 그러므로, 참회와 소망으로 참여하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이유로도 배제되고, 차별받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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