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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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성경구절 창세기 24:34-38/ 로마서 7:15-25a/ 마태복음서 11:16-19, 25-3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7-05
전주 주께로 오라, 말씀하신다(D. Buxtehude)
찬양1부
지휘자
반주자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W. L. Thompson)
후주2부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W. L. Thompson)
성경본문 창세기 24:34-38
노인이 말하였다. "저는 아브라함 어른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셔서, 주인은 큰 부자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주인에게 양 떼와 소 떼, 은과 금, 남종과 여종, 낙타와 나귀를 주셨습니다. 주인 마님 사라는 노년에 이르러서, 주인 어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셨는데, 주인 어른께서는 모든 재산을 아드님께 주셨습니다. 주인 어른께서 저더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인을, 내가 사는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의 딸들에게서 찾지 말고, 나의 아버지 집, 나의 친족에게로 가서, 나의 며느리감을 찾아보겠다고 나에게 맹세하여라' 하셨습니다.

로마서 7:15-25a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태복음서 11:16-19, 25-30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1. 나이가 많은 노인이 된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아들 이삭을 혼인시키려고 합니다. 며느리를 가나안 사람의 딸이 아니라, 자기 고향에서 찾으려고 아브라함은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아 보는 늙은 종을 두 개의 강이 흐르는 땅(메소포타미아)의 상류지역 하란으로 보냅니다. 이 종의 이름은 엘리에셀일 것으로 추정됩니다(15,2-3).

그런데 엘리에셀이 떠나기 전, 아브라함은 자기 다리 사이에 종의 손을 넣고 맹세하게 합니다(24,9). 이런 전통은 아주 오래된 고대의 관습입니다. 이것은 엄숙한 맹세를 요구하는 행동이었는데, 특히 죽기 전에 하는 맹세의 표현이었습니다.

맹세를 마친 엘리에셀은 누가 주인의 며느리가 될 여인인지 전혀 모르고, 낯선 땅으로 길을 떠납니다.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한 아브라함의 종은 성의 외곽지역에 있는 우물가에서 낙타 떼를 처음으로 쉬게 합니다. 물을 길러 집으로 나르고, 가축들에게 물을 먹이는 일은 일반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몫이었기에, 엘리에셀은 우물가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그 종이 주인의 적당한 며느리를 찾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리라고 상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행동에 나서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주님께서 원하시면, 제가 오늘 여기에 와서, 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여기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처녀가 물을 길으러 오면, 그에게 항아리에 든 물을 좀 마시게 해 달라고 말하고, 그 처녀가 저에게 마시라고 하면서, 물을 더 길어다가 낙타들에게도 마시게 하겠다고 말하면, 그가 바로 주님께서 내 주인의 아들의 아내로 정하신 처녀로 알겠습니다.’(24,42-44)

 

기도를 함으로써,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표징을 구합니다. 자기에게만이 아니라 낙타들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는 여인이 주님께서 정하신 여인으로 알겠다고 기도한 것이지요. 그 종은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자신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표징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이 구한 표징은 엄청나게 큰 기적과 같은 표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작은 시험이었습니다. 종은 여성다운 봉사심, 낯선 이에 대한 호의적인 마음, 가축들에 대한 이해심을 떠보려고 한 것이지요. 종의 이런 행동에는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은 신앙과 세상적인 계산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다움은 계몽주의 이전의 유치한 신앙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어른이 된 성숙한 신앙인에게는 크리스마스 동화에나 나옴직한 유아적인 신앙형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셨고(18,3),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고’(18,4),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18,5)고 하여, 자신을 어린이와 동일시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어린이다움은 유치함, 미성숙의 표징이 아니라, 부모와 친구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 오직 현재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개방성의 표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종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즉각적으로 나타났고, 간구한 것 이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여인이 나홀의 집안사람일 것은 기대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그가 기대했던 모든 품성에 곁들여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물을 길어 낙타들에게도 주는 아름답고 적극적인 리브가를 말없이 지켜보면서, 이 종은 이번 여행길에서 주님께서 모든 일을 과연 잘 되게 하여 주신다는 예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리브가의 집으로 초대를 받은 아브라함의 종은 머리를 숙여서 주님께 경배하고, ‘나의 주인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와 주인에게 주님의 인자와 성실을 끊지 않으셨으며, 주님께서 저의 길을 잘 인도하여 주셔서, 나의 주인의 동생 집에 무사히 이르게 하셨습니다하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표징이 놀라운 이적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들을 통하여 드러난다는 이해는 이 이야기 전에는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게, 은밀히 작용하여, 우리를 경탄케 하며, 인간의 내면에서 작용하신다는 신앙적 표현 양식이 이전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로 기적 속에서, 한 지도자의 카리스마 속에서 또는 제의적 사건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표상에 비하여 이러한 신앙 이해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편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고(13,21),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인도하여 내시며(26,8),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지만(왕상 19,11-12), 다른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왕상 19,12), 거리에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입니다.(42,2-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작은 신음소리를 듣고, 세우신 언약을 생각하시는 분(6,5), 원수들에게 억눌려 괴로움을 당하는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지요(2,18).

 

2. 사도 바울도 내적으로 신음한 인물입니다. 그의 고통과 신음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분열된 자아에서 온 것이었습니다(7,15). 이런 분열과 갈등, 어찌 사도 바울만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영화 양들의 침묵의 스탈링 형사, ‘블랙 스완의 발레리나 니나도 그런 인물이고, 어쩌면 인간인 우리 모두의 현실이지요.

 

그러나 바울의 이런 절규는 단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강인한 의지와 자기절제력을 갖춘 사람은 이런 분열과 갈등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에서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7,20). 스스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런 자기에게 악이 붙어 있고,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지체에 있는 죄의 법과 맞서서 싸우지만, 마침내 죄의 법에 포로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7,22-24). 이 절규는 자아가 분열되어 있다는 인식에서가 아니라,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행하는 저 ,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 저 다른 나가 둘이 아니라, 사실은 가장 깊은 곳에서는 결국 같은 존재라는 인식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율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고백했듯이 바리사이파 사람 가운데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났으나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은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율법을 지켰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은 인물이었습니다(22,3-4).

 

그랬던 바울이 그리스도와 만난 후, 이제 율법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하는데 율법은 도움이 됩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마음과 악한 일을 하는 지체 사이의 갈등과 다툼을 알게 하는 것도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선악에 대한 판단도 구별도 할 수 없기에, 율법 그 자체는 선한 것이라고 바울은 동의합니다(7,16).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고 구별한다고 해서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알면서도 악을 행합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인간이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하고 절규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인간, 비참한 인간이 아닙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이 결코 아닌 데서 오는 끝없는 분열과 갈등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같은 율법 아래에서갈등과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못했던 일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8,3). 하나님은 스스로 율법(종교) 아래 있는 인간이 되시어, 율법(종교)에 의해 죽으심으로써,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인간, 율법 때문에 죽어야 할 운명에 있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신 것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공감이라고도 하겠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은 당대의 세대를 공감능력의 상실, 혹은 공감부재의 세대로 규정하셨습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아이들과 같다는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무감정, 무관심, 방관자는 언제나 있었고 오늘도 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타인이나 사회, 나라, 세계, 지구생태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이 무언가 관심을 기울이는 척하면서 입을 열 때면, 대게는 해괴한 양비론으로 다른 사람이나 사태를 비판할 때뿐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금욕적인 삶을 살자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고 비난합니다.(11,18-19).

 

대립되는 두 주장을 시시비비 가림 없이 양쪽 다 잘못되었다고 싸잡아서 비판하는 양비론(兩非論)은 뭐 대단히 중도적인 입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회주의적 자기보신용 속성으로 작동합니다.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쟁점에 물 타기 하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사용되는 것이지요. 매사에 냉소적이거나 홀로 고고한 척 하면서 양비론이 지혜로운 처세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선택의 고통과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입니다(11,19).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지혜는 이른바 세속적인 처세술과 다릅니다. 서점가에 넘쳐나는 이른바 자기개발서들은 대부분 사업성공, 원만한 인간관계, 행복한 가정, 인성개발, 명상, 유명인들의 전기와 평전, 성공예화 등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성경의 지혜문학 가운데는 그와 비슷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저자가 말하는 지혜는 성공비법도, 모난 세상을 둥글게 사는 처세술도, 짧고 굵게 사는 것보다 길고 가늘게 사는 방법론도 아닙니다.

 

마태는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지혜는 그 한 일로,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일을 통하여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스도는 갈릴리 바닷가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4,23; 9,35).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기때문이었습니다(9,36).

 

지혜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처세술이 아닙니다. 지혜는 아프고 고통 받는 사람,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과 책임이라는 행동에서 그 참됨과 거짓됨, 능력과 무능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작 지혜의 스승이라는, 스스로를 지혜 있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게다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이라는 것입니다(11,26). 스스로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병은 스스로 더 배울 것이 없다는 자만심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감추실 필요조차 없습니다.

 

율법을 만들고,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 수행을 감시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사람들, 율법 제정은 물론 해석권도 없고, 다만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 어린아이들 같은 민중(民衆)에게 지혜가 계시된다는 것을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매우 불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 아니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람들, 권리는 무시되고, 오직 의무만 강요받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11,28)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율법은 그것을 제정하고, 해석하고, 지키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도 인간이 감내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멍에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하나님 나라의 멍에로 말한 것은 특별히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혹은 이룰 수 없는 개별적인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29-30)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주님의 짐이 가벼운 것은, 그 멍에와 짐을 주시는 분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의 멍에이기 때문에 편하고, 그 짐은 가벼운 것입니다.

 

4. 지난 73일은 여해 강원용 목사님이 태어나신지 꼭 10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3년 전, 우리교회는 목사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일련의 토크쇼를 진행했습니다. 주제는 지성적 신앙과 일상의 성화였지요. 그 첫 번째 초대 손님이셨던 분으로 기억하는데, 이만열 교수님이 오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고난 받았던 장로교 고신파 출신의 역사학자이시지요. 그 때 이만열 교수님은 평생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 만은 꼭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있는데, 주일성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지키지 못해도, 무언가 단 하나라도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그 분은 멍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짊어진 멍에, 가능한 벗어 던지고 싶은 멍에가 아니라, 스스로 짊어진 멍에이지요. 비록 힘들지만,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함께 하시기에, 아니 그 멍에 함께 짊어지시고 계시기에, 그 짐, 결코 무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찌 신앙생활만 그렇겠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면 어떤 멍에도 불편하고, 다른 사람 눈치 때문에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하면 어떤 짐도 무거운 법이지요.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모든 이들의 친구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 안에서 마음에 쉼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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