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조회수   973
설교제목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성경구절 이사야서 50:4-9/ 빌립보서 2:5-11/ 마태복음서 26:14-25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4-05
전주 주의 보좌로 나아갑니다(J. S. Bach)
찬양1부 거룩한 성(S. Adams) 특송: 최승태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호산나! 주를 찬송하리로다(M. Teschner)
후주2부
성경본문 이사야서 50:4-9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빌립보서 2:5-11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 26:14-25
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무교절 첫째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우리가,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려고 하는데, 어디에다 하기를 바라십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성 안으로 아무를 찾아가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가까워졌으니, 내가 그대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분부하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다. 저녁 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그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예수를 넘겨 줄 사람인 유다가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의 동북쪽 평야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심볼론 산맥을 통과하는 산길을 통해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와 에게 해()로 나갈 수 있는 입구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교역의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는 지리적 장점과 특별히 이 주변에서 양질의 금속이 많이 산출된다는 이점 때문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주전 358/357년에 세운 도시입니다. 그 후 주전 148, 마케도니아는 로마 총독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주전 42년 로마 제국이 내전에 휘말렸을 때, 빌립보는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내전이 끝난 후,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우스는 로마의 퇴역 군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빌립보를 로마의 군사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요, 로마 식민지였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16,12). 활발한 교역과 함께 소아시아의 다양한 제의들도 들어왔습니다. 로마의 신들은 물론 그리스의 신들이 숭배되었고, 에그나치아 가도를 통해 이동하는 상인들과 함께 소아시아의 여러 제의들도 들어와 일종의 종교혼합주의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유대교 공동체도 있었고, 그들은 성문 밖 강가에 기도하는 처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16,13).

 

빌립보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장소인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그 성 안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 중, 소아시아의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았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간청했다고 합니다(16,8-10). 이 환상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것으로 확신한 바울은 배를 타고 빌립보로 건너간 것이지요.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최초의 선교가 시작되었고, 주후 49년과 52년 가을 사이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과 매우 인간적으로 가까운 공동체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처음부터 바울에게 충성을 다했고, 바울 역시 빌립보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그리워했습니다(1,8). 스스로 천막을 만들어 자비량 선교를 한 바울이었지만,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자신의 생계를 보조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특별히 명예롭게 하였습니다. 이런 특권을 바울은 오직 빌립보 교회에게만 허락한 것이지요(4,15-16). 빌립보 교회는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기를 즐겨 했습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했습니다. 그들은 구제하는 일을 마지못해 하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자원해서 하는 특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고후 8,2-4).

 

그런데 빌립보 교회 안에는 이른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성도들의 화합과 평화를 교란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 ‘악한 일꾼들이라고 표현합니다(3,2). 바울은 이곳 외에 다른 어디에서도 이런 욕설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유대교에서 라는 욕설은 무지한 자들, 불신자들, 이방인들을 표시했고, 초대교회에서는 비세례자와 이단들을 가리켰는데, 바울이 교회 안에 있는 적대자들에게 이런 지독한 욕설을 퍼부은 것이지요. 이들은 육체의 할례를 주장하고,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바울은 비난합니다(3,18-19).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 ‘악한 일꾼들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할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통해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삼아 땅의 것만 생각한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헬라적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있던 또 다른 악한 일꾼들열광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지상에서의 삶에서도 신()과의 신비한 합일을 통하여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리낌이자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3,10-11). 도덕적 완전함 혹은 신()과의 합일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울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과정에 있는 실존입니다(3,14).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며,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르지 못하기에, 그리스도인은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는 원수사랑,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신앙생활,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가 전승받은 이른바 그리스도 찬가를 인용함으로써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2,5-8).

이 말씀은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을 도덕적 모범으로 본받으라는 권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본래의 뜻은 헬라어 성경의 원문에 더 잘 드러나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여러분은 서로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한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서 품어야 할 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en Christo Jesu) 품어야 할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우리가 품고 싶다고 해서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싶은 마음이야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또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만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지만, 변덕스럽고 끊임없이 죄로 흔들리는 우리 마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 품은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도덕적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예수님의 삶입니다.

신비한 종교체험을 통해 신()처럼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초대교회 시대의 영지주의자들에게 맞서, 바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오히려 자기를 낮춰 죽기까지 순종한 인간,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신처럼 되려는 종교적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셨다고 증언함으로써, 로마 제국에 맞섰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빌립보는 로마 제국이 퇴역군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만든 군사 식민지였습니다. 오직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주님이라는 칭호가 허락된 시대에, 빌립보 교회는 로마 제국의 총독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것이지요. 위험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고백하면 자칫 목숨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권면한 것입니다(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기때문입니다(2,10). 하늘에 있다고 주장하는 온갖 신(), 땅 위에서 최고의 권력을 주장하는 로마 제국, 지하 세계를 관장하는 신들과 죽음의 세력,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우상들과 정치, 경제 권력, 죽음이라는 주권자가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노예화한 세력들의 자리에,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세상과 우주의 새로운 주권자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한 권세들은 이제 그것들을 분쇄한 분에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보이는 우상들, 돈과 권력, 폭력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숭배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먼 숭배는 노예의 태도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유인의 덕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만 순종할 때, 그리스도인은 모든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 주님을 본받아 자발적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2,3).

 

자유인이지만 스스로 이웃의 종이 된 사람,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교회당 안에서의 집회와 모임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권고를 종교탄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황당하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감염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감염병의 원인이 되지 않기 위한 사랑의 거리두기’, ‘잠시 멈춤이 어째서 종교탄압일 수 있는지, 그 논리가 납득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형 개신교단들이 저마다 성명서와 목회서신을 발표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정부의 방역지침에 반발하고 있는 것은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을 섬기신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장서서 방역활동에 동참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사태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돕고, ‘코로나 이후변화될 세계의 도전을 극복할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2,27)고 말씀하시고, 스스로 종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공동체가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도 공동체를 깨는 악덕 목록에 경쟁심허영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라고’(2,3) 권면합니다. 경쟁심은 쓸모없는 다툼을 불러오고, 허영은 자기과시와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로 귀결되기 때문이지요. 공동체 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야 탓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여 칭찬받으려는 경쟁심이나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덕은 겸손입니다. 그런데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는 겸손이 결코 존중받을 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에게 겸손은 오직 종과 노예에게 요청되는 속성이었습니다. 심지어 겸손이라는 단어, ‘타페이노스저급한, 무능한, 경박한, 나쁜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겸손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곳은 오직 유대교였습니다. 잠언에 따르면, ‘진실로 주님은, 조롱하는 사람을 비웃으시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잠언 3,34)고 합니다. 겸손은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이지, 이웃에 대한 태도로서 고려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겸손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청한 것이지요. 겸손이 인간관계에서 높이 평가된 곳은 오직 쿰란 공동체와 초대교회였습니다. 쿰란 공동체 안에서 겸손은 선한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규율이었습니다.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합일, 온유한 겸손, 사랑의 결속, 그리고 옳은 생각 안에서 서로 교제할 것이 공동체규율에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은 빛의 영의 길에 속하며, 성실과 화합과 함께 공동체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바울은 쿰란 공동체의 이런 생각을 공유한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겸손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합니다. 겸손은 외적인 몸의 자세나 태도가 아니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다고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보면 경쟁심이 생기고, 자기보다 못하다 싶은 사람 앞에서는 허영심에 사로잡혀 거드름을 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림으로써 반사이익을 취하거나 은근히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심보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에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에게서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지요.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걸어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 될 사람이 있다고 말한 공자(孔子, BC 551-BC 479)같은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이웃 인간에게도 겸손해야 한다고 요청한 것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그리스도의 겸손 때문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도 오래 전에 주님은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고, 침을 뱉고 모욕하여도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견디심으로써’(50,5-6)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고 예언했습니다. 겸손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 계시고’(50,8), ‘나를 도우신다는 믿음으로(50,7),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는 마음입니다(50,7). 지금은 비록 어둠 속에 있지만, 주님께서 나를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빛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인물입니다. 마태는 유다가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돈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가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은 은돈 서른 닢은 소가 받아 죽인 노예 한 명의 목숨 값과 같았습니다(21,32). 이것은 우스울 정도로 적은 액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26,16)는 마태의 보도는 결국 돈이 이유였음을 확인해 줍니다.

그러나 유다의 진정한 배신 이유는 아직도 확연하게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테러리스트로서 폭력으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종식시키려던 그가 예수님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배신했다는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습니다. 만일 돈을 기대했다면 유다는 은돈 서른 닢에 모욕을 느꼈을 것이고, 더 많은 돈을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단지 돈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다의 배신 이야기를 전승하고 있는 누가복음서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22,3)고 보도하고, 요한은 유다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고, 그는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는데, 때는 밤이었다고 합니다(13,27-30).

 

사탄이 그에게 들어가자, 그는 생명과 빛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음과 어둠을 선택한 사람이 된 것이지요. 요한은 가룟 유다를 죽음과 어둠으로부터 생명과 빛으로의 변화를 이행할 수 없었던 사람, 아니 생명의 빛을 아예 꺼뜨리려고 하는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로 묘사합니다. 배신은 베드로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갔지만, 유다는 어둠 속에 머물러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누구나 기회는 있고, 선택은 결국 자기 몫입니다. 어둠을 선택할 것인지 빛을 선택할 것인지,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 생명을 선택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을 것인지 모욕에 마음 상하지 않고 견딜 것인지,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할 것인지 겸손한 마음으로 할 것인지 결국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2,8-9). 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니,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과 시비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로 만드실 것입니다(2,13-15).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예배일 절기 설교제목 설교자
1303 2025-07-13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네가 무엇을 보느냐 권영림 목사
1302 2025-07-06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예루살렘에 평화가 넘치게 임영섭 목사
1301 2025-06-29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 임영섭 목사
1300 2025-06-22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임영섭 목사
1299 2025-06-15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서울주교좌성당)    누구를 위한 상속인가? 임영섭 목사
1298 2025-06-15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경동교회)    주님과 함께 춤을... 박성순 신부
1297 2025-06-08 성령강림주일    하나님 안에서 임영섭 목사
1296 2025-06-01 부활절 일곱째 주일    하나님의 의 임영섭 목사
1295 2025-05-25 부활절 여섯째 주일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임영섭 목사
1294 2025-05-18 부활절 다섯째 주일    하나님의 집 임영섭 목사
1293 2025-05-11 부활절 넷째 주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임영섭 목사
1292 2025-05-04 부활절 셋째 주일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김진 목사
1291 2025-04-27 부활절 둘째 주일    복음의 대가 임영섭 목사
1290 2025-04-20 부활주일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임영섭 목사
1289 2025-04-13 종려주일    장애를 가진 하나님 임영섭 목사
1 2 3 4 5 6 7 8 9 10 ... 87
전체 메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