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열한번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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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성경구절 욥기 19:23-27a/ 데살로니가후서 2:1-5/ 누가복음서 20:27-38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11-10
전주 깊은 고난에서 주께 간구하나이다(F. Mendelssohn)
찬양1부 하늘의 종(Roger C. Wilson)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Bob Chilcott)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죄짐 맡은 우리 구주(C. C. Converse)
후주2부 주 예수 이름 높이어(J. Corell)
성경본문 욥기 19:23-27a
아,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으면!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나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고 있다. 너희는 내게 고통을 줄 궁리만 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칠 구실만 찾고 있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칼을 두려워해야 한다. 칼은 바로 죄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분노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이는 일을 두고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영이나 말이나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에 속아서,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이런 일을 여러분에게 거듭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누가복음서 20:27-3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남겨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를 맞아들여서 뒤를 이을 아들을 자기 형에게 세워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얻어서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고, 그 다음에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렇게 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서 그는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1. 옛날에 팔레스타인 외부, 동쪽,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성 가까운 곳, ‘우스땅에 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장시대의 전설적인 의인으로, 가정적으로는 행복하고(1,2), 도성에 사는 재산이 많은 거부이자(1,3), 모든 일에 신중하고(1,5), 종교적으로도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욥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와 라틴어 번역에서 끌어온 영어식 표기인데, 히브리어 어근, ‘’(yb), ’, ‘원수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명과, 아람어 어근, ‘’(wb), 인내하다’, ‘회개하고 돌아서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욥이 사탄의 공격을 받고 친구들은 물론, 심지어는 그의 아내로부터도 비난을 받은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마침내 회개하고(42,6), 다시 이전의 삶을 회복한 인물이라는 점에서(42,10), 그의 이름의 어원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고고학자 올브라이트는 욥이라는 이름이 기원전 1,500년경의 아카디아 문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름 아야-아붐’(ayya-abum)의 단축형으로, ‘나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뜻을 가진다고 합니다. 욥이라는 이름의 이런 뜻도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아니 절규(絕叫)를 한 야곱의 운명을 예시하는 것 같습니다.

 

욥 이야기는 하나님과 사탄의 계약으로 시작됩니다.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돌아온 사탄에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이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1,8).

 

그러자 사탄이 말합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1,9-11).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는 비아냥이지요.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1,12).

 

드디어 사탄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가축들을 빼앗아가고, 종들은 모두 살해당합니다. 겨우 남은 가축들도 벼락에 맞아 죽습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강풍에 집이 무너져 한꺼번에 모든 자식들을(아들 일곱과 딸 셋) 잃습니다.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 법, 욥은 한꺼번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1,21)라고 말합니다.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지만, 흔들리지 않는 욥, 마침내 사탄은 그의 몸을 칩니다.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까지 악성 종기가 나게 합니다.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것입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2,9).

욥은 그의 인생의 밑바닥,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것이지요. 그러나 신실한 욥,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말하면서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2,10).

 

소문을 들은 친구 셋이 찾아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그들입니다. 친구를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 왔지만, 막상 고통 받는 욥을 보고 그들은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씁니다. 친구가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2,12-13).

 

마침내 욥이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울부짖습니다: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순간에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나를 무릎으로 받았으며, 어찌하여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물렸던가?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은 내가 편히 누워서 잠들어 쉬고 있을 텐데.’(3,10-13).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한 원망은 부모를 넘어 이제 하나님을 향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3,23).

 

마침내 사탄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욥은 드디어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라고 말했던 신실함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대들면서 하나님과 다투는 욥의 울부짖음이 듣기 거북했던 세 친구들이 입을 엽니다. 그들은 욥에게 그에게 닥친 재앙은 이유 없이 온 것이 아니니, 잘 살펴보라고 충고합니다. 재앙과 고난은 분명 그의 죄 때문에 온 것이라는 말이지요.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없고,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없었고’(4,7), 하나님은 심판을 잘못하시지 않으시며(8,3), 죄를 지은 사람들을 벌하시는 분이시니, 분명 욥의 죽은 자식들은 죄를 지었으리라는 것입니다(8,4).

 

위로는커녕,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면서, 자신을 규탄하고 조롱하는 친구들은 마치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미는 사람과 같았습니다(12,5). 그들은 고통 받는 친구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신이 들은 지혜전통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을 변호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허튼 소리, 알맹이도 없는 말, 흙벽에 써 놓은 답변 같은 말만 합니다(13,7-12). 고통 받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그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건만, 친구들은 옛 지혜에 의지하여 욥을 나무란 것이지요.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자기가 조상들로부터 배운 공개된 지혜를 욥에게 가르칩니다. 그 지혜는 악한 일만 저지른 자들은 평생 동안 분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잔인하게 살아온 자들도 죽는 날까지 같은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15,20). 이 말은 다시 말해 지금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가 지은 죄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19,5).

 

그러나 욥은 친구의 지혜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욥을 괴롭힌 것은 자신이 까닭 없이 당한 재난과 고통만이 아니었습니다. 선하게 살면서 믿음을 지켜온 자기는 주님께서 학대하고 멸시하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10,3):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21,7-9).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 라는 질문만큼이나, ‘왜 악한 사람이 잘 사는가?’라는 질문도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지혜전통에 기대어 혹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이같은 질문에 이런 저런 답변을 합니다. ‘인과응보라고. 재난과 고난은 지은 죄의 결과이고 그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또 다른 사람은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라고 주장합니다(36, 15). 신은 인간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신다는 것이지요(33,19).

 

물론 자업자득이라고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로 고통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난에는 이 대답이 정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롭고 선한 사람의 고난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또 착한 사람의 고난에는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기 때문에 그저 고난을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잔혹한 대답입니다.

그리고 만일 고난이 사려 깊은 인격을 만들기 위한 시험이라면, 하나님은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험에서 실패하고 마는지를 살피서야 합니다.

이런 저런 대답이 호응을 얻지 못하면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내세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상살이의 불공평함을 견뎌내게 해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불의를 외면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핑계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성과 용기로 그 불의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 구실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전적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과 다툽니다. 욥은 자기에게 복을 내려주신 분도, 자기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기에게 영광을 주시고 면류관을 씌어주신 분도, 자기를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자기가 가는 길에 빛을 비추신 분도, 가는 길을 어둠으로 가로막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합니다(19,6-9).

 

그러므로 자기를 구원하실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욥은 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 자신과 대면하기를 원합니다. 친구들의 충고도, 오래 전승되어온 지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그 답을 듣기를 원합니다.

 

세 친구와 젊은 지혜자 엘리후와의 대화가 끝나자,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나섭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욥에게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38,4).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지구의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과 다투던 욥은 마침내 고백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42,5).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어(19,20), 아내조차 그가 살아 숨 쉬는 것을 싫어하고, 친형제들도 그를 역겨워하던 때(19,17), 욥이 가졌던 마지막 희망,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19,25-26)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지요.

 

 

2. 신앙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들을 귀로 듣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마지막은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뵙는 데서 완성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깨달음은 아직 나 자신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우리가 청동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것과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처럼,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소문들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도 여러 소문에 흔들리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짜 편지를 가지고 종말의 날이 왔다고 소문을 퍼뜨리면서,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당황해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살후 2,2-4).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살후 2,16-17).

 

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은 올바른 깨달음에서 옵니다. 예수님 시대,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엄격하게 율법만을 준수했기에, 부활을 헛된 소문 정도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부활을 믿었던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했습니다. 유대 사회에는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남겨두고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맞아들여 뒤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 신명기 255절에 근거한, 이른바 수혼법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런 관습, 시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가계를 잇는 관습은 고대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고, 이런 관습의 목적은 과부가 된 형수가 후손을 낳아 재산을 물려받게 함으로써 혼자가 된 여성의 생존을 보장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둘째도 죽고, 셋째도 죽고, 그러다가 마침내 일곱 형제가 다 죽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일곱 형제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이지요. 사두개파 사람들의 이런 질문은 그들이 부활의 삶을 지상적 삶이 죽음 이후 하늘에서 연장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20,34-3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저 세상을 구별하심으로써 결혼 자체, 혹은 결혼으로 상징되는 이 세상에서의 일상을 죄악시하려는 의도를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두 세상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모든 사람이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의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저 세상에서는 결혼하는 일이 없다는 것도 자녀생산의 방편으로서의 결혼, 혹은 사회적 약자인 과부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편으로서의 결혼, 아니 결혼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혹은 이 시대에 지속되고 있는 일상의 현실이 저 세상 혹은 오고 있는 시대에서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죽지도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으로는 죽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20,38).

 

 

3.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병으로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아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맺은 관계 속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평생을 흠 없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면서 살아온 자기가 왜 이런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누구도 대답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지혜의 전통은 삶의 모호함에 대하여 납득할만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하나님도 침묵하십니다. 욥은 절규하면서 부르짖었고,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셨을까요? 욥의 절규를 못들으셨을까요? 아니면 욥의 세 친구들의 주장이 옳다고 긍정하시기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침묵에, 욥은 모든 잘못이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합니다(32,2). 선한 이들이 고난을 받는 것도, 악한 이들이 더 잘되는 것도, 그 책임은 모두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그런 분이실까요?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병이나 사고나 자연재해를 두고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운이 없어서 일어나고, 어떤 것은 우리 주변의 나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며, 어떤 것은 우리가 인간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스런 일들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벌도 아니요, 하나님의 어떤 원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닙니다.

 

삶의 비통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것을 높은 하늘에서 단지 바라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극을 당했다하여 하나님에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에게 돌아가 삶의 모호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분명히 우리만큼 노여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 받는 현실에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지는가?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말했다고 합니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지만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용기를 잃지 않고, 삶의 부조리에 맞서, 하나님과 정직하게 씨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다투는 것,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삶의 부조리에 맞서 욥처럼 부르짖으면서 하나님과 씨름하면, 마치 욥이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만 듣다가 마침내 눈으로 하나님을 뵈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보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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