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셋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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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성경구절 열왕기하 2:9-14/ 갈라디아서 5:13-25/ 누가복음서 9:57-62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6-30
전주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J. S. Bach)
찬양1부 목 마른 사슴같이(박재훈)
지휘자 박수길 장로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성령이여, 임하소서(Thomas Attwood)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너 주의 사람아, 믿음에 굳게 서라(G. Young)
후주2부 너 주의 사람아, 믿음에 굳게 서라(G. Young)
성경본문 열왕기하 2:9-14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 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들고 돌아와, 요단 강 가에 서서,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그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외치고, 또 물을 치니,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엘리사가 그리로 강을 건넜다.

갈라디아서 5:13-25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누가복음서 9:57-62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1.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와의 만남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만남만큼이나 드라마틱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세벨 여왕의 살해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 엘리야가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청합니다(왕상 19,2-4).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시면서, 엘리야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아벨므흘라 출신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십니다(왕상 19,16-18).

엘리야가 그 곳을 떠나서, 길을 가다가 사밧의 아들 엘리사와 마주쳤을 때, 그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곁으로 지나가면서,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다만 자기의 외투를 그에게 던져 줍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입은 외투는 아마도 동물의 털로 만들어진 망토 같은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낙타 털옷을 입고 있었고(1,6), 이슬람의 신비주의자들인 수피들도 털옷을 걸쳤던 것으로 미루어, 털로 만든 망토는 특별히 선택된 혹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선지자나 금욕주의자, 신비주의자들의 의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예언자가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에게 자기가 입었던 외투를 씌워 주는 것은 접촉을 통한 주술의식의 하나였습니다. 외투는 그 사람 몸과의 절친한 접촉을 나타내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인품과 능력이 주입된다는 믿음이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엘리사가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으로 요단강물을 치자,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고, 엘리사는 그리로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이지요(왕하 2,14). 모세가 출애굽 하면서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팔을 내밀자, 바닷물이 갈라진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야기입니다(14,16).

 

엘리야가 외투를 던져 주었을 때, 엘리사는 한 번도 그 전에 엘리야를 본적이 없었지만, 아마 곧바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을 제자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엘리사는 소를 버려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서 말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있을 수 있는 반응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라 나서기 전에, 부모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이고,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허락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돌아가거라. 내게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왕상 19,20)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아니 참으로 무정한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조건을 내세운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르신 것이지요. 그러자 그는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9,59-60).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해도,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게다가 당시 랍비들의 교훈에서도 죽은 친족의 장례는 유대인으로서 거룩한 의무이자 사랑의 행동이고, 부모 공경은 제5계명으로서(20,12) 이생과 내생에서의 보상이 약속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율법을 지키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의 장사는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이들에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설령 그것이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율법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부름을 받은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항하며 따르기를 예수님은 요청하신 것이지요.

 

여기서는 율법이 예수님의 부르심과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 사이를 막는 장벽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 필연적으로 모든 율법, 곧 모든 기존의 규정과 제도와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현실의 법과 관습, 제도와 가치, 우리의 개인적 욕구와 충돌하면서 갈등을 일으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택과 행위의 우선순위가 문제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작게는 자녀교육에서 주일성수와 주일과외공부 사이의 갈등에서부터 크게는 신앙양심과 국가 또는 경제권력 사이의 대결에 이르기까지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사람은 스스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자신의 계획과 판단에 따라 조정하고, 정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하나인 것이지요. 그에게 제자직이란 자기가 제시한 조건들과 전제들이 충족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유일한 가능성,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닙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요즘 말로 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만 했을 적에는 말이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 과거의 자기 경험만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 아픈 과거이건 자랑스런 과거이건, 이미 자기 것도 아닌 과거, 오직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과거에 사로잡혀 절망과 오만 사이를 오가는 사람, 하여 변화된 현실,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 뒤를 돌아다보느라고 쟁기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도, 밭이 제대로 갈아 엎어지는지도 모르는 사람, 미래는커녕 현재에도 성실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야 살 수 있는 보화가 묻힌 밭과 같고(13,44), 가진 것을 다 팔아야 살 수 있는 값진 진주(13,46)와 같기 때문입니다. 한 눈 팔면서 쟁기질 하는 사람, 뒤를 돌아다보면서 밭을 가는 사람은 결코 찾을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현재와 과거와의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단절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과거, 집안 식구들은 현재를 의미합니다.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과거에 마음이 고정되어 있고, 현재에 발목이 붙잡혀있는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명령에는 오직 순종과 불순종 사이의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조건과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적당히가 없다는 것이지요. 부름에 따라 나서는 첫걸음은 따르는 자를 예전의 생활로부터 단절시킵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가 된 이들의 현재는 더 이상 과거의 연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리였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세관을 버려야 했고(2,14),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는 그들의 그물을 버려야 했습니다(1,18). 그리고 그들의 현재도 모두 변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세금과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는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 1906-1945)의 말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믿음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순종이 순차적으로 온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순종은 믿음의 하나의 결과이고, 믿음은 순종의 전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의 첫걸음 안에 이미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행위가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순종 없이 믿음이 있을 수 없고, 믿음은 순종의 행위 안에서만 믿음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불순종에 머물러 있는 한,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믿음을 부족한 순종의 탓으로 돌리고, 부족한 순종을 부족한 믿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악한 도피, 혹은 불순종의 정당화입니다. 그것이 어떤 명령, 주님의 어떤 말씀일지라도, 비록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우리 자신의 의지와 충돌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이미 믿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불신앙 안에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첫 번째 순종은 과거와 현재로부터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단절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9,62).

 

사기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이지요. 싸움터로 나가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을 각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라의 항우가 진()나라와 거록에서 싸울 때, 강을 건너는 배를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려 죽을 각오로 싸워 크게 이긴 데서 연유한 말입니다. 돌아갈 배도, 밥을 지어먹을 솥마저 없어졌으니,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아홉 번을 싸우는 동안 진나라의 주력 부대는 궤멸되고, 승리한 항우는 맹주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과거도 없고, 변하지 않는 현재도 없습니다. 옛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6,6),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옛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고후 5,17).

 

미국의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영부인, 엘레노어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 1884-1962)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 인권위원회 회장(1946), 1952년까지 미국의 국제연합 대사를 역임하면서 인권선언문 제정에 크게 공헌하여, 미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퍼스트 레이디입니다. 그 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언들도 많이 남겼습니다:

 

돈을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입니다. 친구를 잃은 것은 더 많은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은 자는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He, who loses money, loses much; He, who loses a friend, loses much more; He, who loses faith, loses all).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입니다.’(Beautiful young people are accidents of nature, But beautiful old people are works of art).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지요: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신비이며, 오늘은 선물입니다.’(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Today is a gift).

 

그렇습니다. 어제는 이미 역사가 되어 우리가 고치거나 더할 수 없고, 오고 있는 내일은 알 수 없는 신비에 쌓여 있어 흥분과 불안이 교차하기에, 오직 오늘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과거는 단지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으로 용납된 시간이고, 현재는 은혜로 충만한 선물이며, 미래는 불확실한 신비가 아니라, 소망으로 약속받은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므로 더 이상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용서받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고 있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신비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뜬구름 같은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전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남은 것은 오직 현재,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쓰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데 쓰는 것,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를 추구하는 것(5,22-23),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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