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자기 일을 스스로 끝내는 사람 |
---|---|
성경구절 | 창세기 15:7-12/ 빌립보서 3:17-4:1/ 누가복음서 13:31-35a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3-17 |
전주 | 우리가 고난에 처할 때, 주여 구원하소서(J. S. Bach) |
찬양1부 | 주여 내 죄를 사하소서(Arthur Seymour Sullivan)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오 구세주 예수(E. Elgar)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내 주를 더욱 더 사랑합니다(A. J. Gordon) |
후주2부 | 내 주를 더욱 더 사랑합니다(A. J. Gordon) |
성경본문 |
창세기 15:7-12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빌립보서 3:17-4:1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누가복음서 13:31-35a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
1. 십자군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의 하나였습니다. 약화된 교황권을 강화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가짜 뉴스로 선동된 전쟁,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난 전쟁, 성지탈환이라는 미명 아래 무슬림과 유대인들에 대한 약탈과 학살만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인들까지 학살한 전쟁, 심지어는 어린이들까지 동원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지난 2005년에 상영된, 리들리 스콧이 만든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은 제1차 십자군 전쟁 이후(1096년부터 1099년까지), 십자군이 무슬림으로부터 탈환한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전설적인 영웅, 살라딘(Saladin, 1138-1193)에게 1187년에 다시 빼앗기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습니다.
이 당시는 보두앵 4세가 예루살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나병에 걸려 24살의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그는 예루살렘과 십자군 국가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켜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은으로 만든 가면과 하얀 망토를 착용하고 나오는데, 그는 1177년, 살라딘의 1만 3천명의 대병력에 맞서 기병 5백 명과 ‘템플 기사단’ 기병 80명만으로 살라딘의 대군을 퇴각시키는 공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 왕위를 이어받은 기 뒤 뤼지냥은 이슬람 상단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살라딘의 누이를 죽여 전쟁을 일으키게 합니다. 전쟁을 원했던 기 뒤 뤼지냥은 십자군을 소집해 이슬람세력을 정벌하러 가지만, 살라딘에게 참패를 당해 포로로 잡히고, 여세를 몰아 살라딘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었던 인물은 발리앙 이벨린이었습니다. 그는 60명의 기사들과 떠돌이 용병들과 함께 살라딘의 대군에 맞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외롭게 예루살렘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발리앙 의 고독하지만 용맹스런 항전에 감격한 살라딘은 발리앙과 협상을 하고, 자신의 재산을 포로들의 몸값으로 내어주면서까지 예루살렘 안에 있던 노인, 미망인, 고아를 포함한 모든 유럽인들이 안전하게 퇴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야만적으로 정복하고 수많은 무슬림, 심지어 유대인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했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살라딘은 1187년, 지극히 평화적이고 우호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했습니다. 그는 ‘천국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자비’라고 하면서 함락된 도시에 자비를 베풀어, 적국의 왕과 포로들까지도 사랑과 용서로 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 살라딘에게 감복한 많은 이들은 그를 ‘가장 기사도적이며 고결한 정복자’라고 칭송했습니다.
살라딘은 대대적인 규모로 성지 탈환을 위해 제3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눈병으로 고생했을 때, 과일과 눈(雪)을 보내고, 자신이 잡은 포로들을 관대히 대했으며, 전리품은 모두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살라딘이 파란만장했던 군주로서의 삶을 55세의 나이에 마쳤을 때, 그는 생전에 가진 것을 모두 남에게 주었기에 정작 자신의 장례를 치를 비용까지도 빌려야 했습니다.
군주로서의 관용과 청렴의 삶을 실천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항쟁과 모두의 죽음이든지 아니면 항복과 타협이든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성문 밖에서 살라딘과 발리앙, 두 사람만의 협상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군이 입성할 때, 예루살렘의 모든 무슬림을 학살한 1099년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발리앙은 ‘서로의 성지가 이 미친 전쟁의 원인이니, 차라리 모두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처자식들을 살육하고, 재물과 재산을 모두 불태워, 약탈할 만한 동전 한 잎, 노예로 삼을 인간 하나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바위의 돔과 알 아크사 사원을 비롯한 다른 성소들도 모조리 파괴할 것이고, 우리 수중에 있는 무슬림 노예들 – 한 5천 명 정도 – 역시 살육할 것이며, 가축과 말도 죄다 도살해버릴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명예롭게 죽든지 기사답게 정복하련다.’
살라딘을 믿을 수 없던 발리앙은 발악적으로 위협했던 것이지요. 그러자 살라딘은 말합니다. ‘만일 항복한다면, 모든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살라딘이다’고 합니다. 협상은 이루어졌고, 각자 자기 진영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살라딘의 등에 대고 발리앙이 묻습니다: ‘도대체 예루살렘은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살라딘은 걸어가면서 말합니다: ‘nothing’(아무 것도 아니야). 발리앙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 아무 것도 아닌 이 도시를 정복하려고 그리스도교는 200년 동안 십자군 전쟁을 벌였단 말일까요? 이 아무 것도 아닌 도시를 위해 그 많은 무슬림들이 목숨을 바쳐야 했단 말일까요? 그런데 몇 발자국 더 걷던 살라딘, 뒤를 돌아보면서 웃으며 말합니다: ‘everything’(모든 것이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인 도시’, 이것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무슬림에게 예루살렘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화로’(아리엘), ‘다윗의 도시’, ‘시온’(다윗이 예부스인들로부터 빼앗은 요새화된 언덕의 이름), ‘신의 동산’으로도 불린 예루살렘, 본래 가나안인들이 섬겼던 일몰의 신, ‘샬림’(Shalim) 신의 집이라는 뜻이었던 ‘예루-샬렘’(Jeru-Shalem)이 기원전 13세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함께 샬렘이라는 단어와 평화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롬(Shalom)을 혼동하게 되었고, 그 후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고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 그러나 지난 3천년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한 번도 평화로운 적이 없었던 도시, 3천년 동안 포위되고, 방어되고, 정복당하고, 파괴되었다가 다시 건축되기를 40차례나, 그것도 모두 신(神)의 이름으로 그랬던 도시의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함과 희생, 그리고 뿌려진 피 위에 세워진 도시이지요. 지난 2천년 동안, 예루살렘의 지배세력은 열한 차례나 거듭 전복되었고, 거의 모든 경우 극단적 폭력을 수반했으며, 그 전면에는 늘 종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 피의 도시였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몇 번이나 품으려 하였으나,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도시’, 하나님의 끝없는 인내와 하나님 백성의 끝모를 불신이 그치지 않고 충돌한 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예루살렘의 역사를 회상하셨을지 모릅니다. 여호야김 왕은 우리야 선지자를 예루살렘에서 살해했고(렘 26,23),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생명을 빼앗길 뻔 했습니다(렘 38,6). 스가랴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처형당했고(대하 24,21), 므낫세 왕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너무 많이 흘리게 해 그 피가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왕하 21,16; 24,4).
예언자들을 죽인 도시, 예루살렘은 ‘버림받을 집’,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될 도시’였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곳,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러 다시 오실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예루살렘과 상징으로서의 예루살렘, 죽음과 부활, 파멸과 구원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만 ‘세계의 화약고’가 아닙니다. 상징으로서의 예루살렘은 이제 전 지구적 화약고로 존재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평화가 파괴되는 곳, 신앙의 이름으로 테러가 일어나는 곳, 어디에나 그곳에는 상징으로서의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 남섬 최대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슬람 사원 두 곳에서 총격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49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다쳤습니다. 용의자로 체포된 호주 국적의 브렌턴 태런트(28)는 카메라가 장착된 헬멧을 착용한 뒤, 테러 장면을 페이스북을 통해 생중계했습니다. 모스크로 들어갈 때, 그는 ‘파티를 시작하자’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이 다르다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행위를 그는 파티를 벌리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범행 직전에 공개한 선언문을 통해 그는 ‘이것은 백인들의 땅을 지키기 위한 테러이고, 무슬림은 침략자라고 규정했습니다.’
2. 그런데 헤롯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최고 권력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런 두려움과 전율은 해가 질 무렵, 희생제물을 차려놓고 깊이 잠든 아브라함을 짓눌렀던 깊은 어둠과 공포와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창 15,12).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눅 13,32-33).
‘내 일을 끝낸다’는 헬라어 단어의 본래 뜻은 ‘완성하다’(텔레이온/ 눅 2,43; 행 20,24) 또는 ‘내가 끝에 도달하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수동형으로 쓰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역의 중재자이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헤롯 왕의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지금까지 해 오시던 일, 곧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완성하시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그가 설령 최고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그 어떤 인간적 반대일지라도, 그것이 설령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의해 이끌리는 자신의 삶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통해서, 예루살렘 때문에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지리적 이동 경로였습니다. 이것은 갈릴리 지역의 통치자인 헤롯 왕을 피하기 위한 도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심으로써, 헤롯 왕이 자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었던 과거의 예언자들과 같은 운명을 당할 예언자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헤롯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은 헤롯 왕의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을 스스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운명, 곧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누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일까요?
3. 사도 바울은 자기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배를 자기네 하나님으로 삼지 않고, 땅의 것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는 사람’(빌립보서 3,17-4,1)이,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시민권은 국가가 부여하는 권리와 고향을 가질 수 있는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만일 하늘에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당시 로마의 시민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고향을 둔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이 어찌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삼을 수 있으며, 세상 권력의 위협을 두려워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배를 자기네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 하나님을 자기 욕망 충족의 수단이나 도구로 악용하는 사람, 오직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빌 3,18).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말고, 자기를 본받으라고 합니다(빌 3,17). 이런 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히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아니 그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도 눈여겨보라고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 멸망 받을 사람들,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들,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야 주님께서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빌 3,21).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희망은 몸의 부활, 곧 우리의 비천한 몸이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세속적 욕망의 충족이나, 역사의 성취가 아니라, 그 누구에 의해서도 침해받지 않는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서 나타나는 부활의 삶, 변화된 삶을 지향합니다.
4. 시인 정호승(1950- )의 ‘봄길’이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 길이 끝났다고, 더 이상 갈 길이 없다고 모든 사람이 주저앉거나 절망할 때, 길이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한결같이 그 길을 걸어온 사람이지요. 설령 그 길의 마지막이 막힌 길이 될지라도 오직 한 길을 걸어온 그런 사람만이 길이 끝난 곳에서 스스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최고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쉬지 않고 하다가, 마침내 자기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자기 일을 완성하셨기에,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난 길에서 부활의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은 사도 바울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본받아 살면서 한 길을 가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도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
1302 | 2025-07-06 |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 예루살렘에 평화가 넘치게 | 임영섭 목사 |
1301 | 2025-06-29 |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 | 임영섭 목사 |
1300 | 2025-06-22 |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 임영섭 목사 |
1299 | 2025-06-15 |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서울주교좌성당) | 누구를 위한 상속인가? | 임영섭 목사 |
1298 | 2025-06-15 |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경동교회) | 주님과 함께 춤을... | 박성순 신부 |
1297 | 2025-06-08 | 성령강림주일 | 하나님 안에서 | 임영섭 목사 |
1296 | 2025-06-01 | 부활절 일곱째 주일 | 하나님의 의 | 임영섭 목사 |
1295 | 2025-05-25 | 부활절 여섯째 주일 |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 임영섭 목사 |
1294 | 2025-05-18 | 부활절 다섯째 주일 | 하나님의 집 | 임영섭 목사 |
1293 | 2025-05-11 | 부활절 넷째 주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 임영섭 목사 |
1292 | 2025-05-04 | 부활절 셋째 주일 |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 김진 목사 |
1291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1290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1289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1288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