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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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창세기 45:4-5/ 고린도전서 15:47-50/ 누가복음서 6:27-29, 35-36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2-24 |
전주 | 이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D. Buxtehude) |
찬양1부 | 지켜주시네, 이스라엘(Felix Mendelssohn)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는 오직 사랑(Ward-Stephens)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다(Thesaurus Musicus) |
후주2부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다(Thesaurus Musicus) |
성경본문 |
창세기 45:4-5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7-50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합니다. 누가복음서 6:27-29, 35-36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1.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눅 6,27-29)
누가복음의 이른바 ‘평지설교’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도 전승되고 있지만, 그 순서와 내용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승 자료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지만, 마태와 누가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 뒤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며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네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는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눅 6,29)고 함으로써 누가 뺨을 치는 사람인지 구체적이지 않지만, 마태는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 5,39)고 함으로써, 때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때리는 사람은 손 등으로 때리는 것이 분명하고, 이것은 유대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욕적인 구타는 식민지 종주국 로마제국의 군인이 피지배민족인 유대인들에게 했음직한 행위입니다. 설령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할 수 있는 폭행이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마태의 상황이 로마 제국의 군인과 관계된 것임은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 5,41)는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군장을 하고 행군하는 로마 군인이 지나가는 식민지 백성 누구에게나 시킬 수 있는 일종의 징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옷을 빼앗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는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눅 6,29)라고 하는데, 마태는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마 5,40)고 함으로써 마태는 강탈 상황이 아니라, 재판 상황에서 일어난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겉옷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재산입니다. 특히 노숙을 하는 이들이나 목동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옷이지요. 그러므로 남의 겉옷을 빼앗는 사람이라면, 그는 강도이든지, 아니면 그 자신도 가난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마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마지막 속옷까지 벗어 주어야 하는 하층민 사이의 재판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속옷까지 다 벗어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유대 전통에 따르면 겉옷을 놓고 재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의 마지막 인권인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출애굽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정녕 너희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데,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자애로운 나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출 22,26-27).
신명기 법전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면, 당신들은 그의 담보물을 당신들의 집에 잡아 둔 채 잠자리에 들면 안 됩니다.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며, 당신들에게 복을 빌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신 24,12-13).
이른바 산상설교가 전승되고 있는 마태와 누가 복음 사이의 이런 차이는 전승받은 자료의 차이에서 온 것일 수 있겠지만, 마태와 누가의 ‘삶의 자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태의 상황은 정착 상태에 있는 신앙 공동체를 반영한다면, 누가의 상황은 아직 방랑의 급진적 삶을 살아가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자신을 모욕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지키기 어려운, 아니 때로는 지키고 싶지 않은 이 말씀에 왜 우리가 순종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당한대로 갚아주는 것이 인간적이고 정당한 일이지 않을까요! 구약성경도 다양한 보복원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출 21,23-25)
‘자기 이웃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입힌 만큼 그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혀라. 부러뜨린 것은 부러뜨린 것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상처를 입힌 사람은 자기도 그만큼 상처를 받아야 한다.’(레위기 24,19-20).
이른바 ‘동태복수의 법’입니다. 이것이 정의로운 방법 같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보복하지 못하면, 화병에 걸리거나, 화병이 심하면 죽기도 하는데,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셔서 우리를 더 힘들게 하시는 것일까요! 힘센 사람에게 맞섰다가는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그러라고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더 큰 보상 혹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일까요?
누가는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눅 6,32-33)고 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대응이 ‘장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태는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 5,46)고 합니다. 개역개정판과 공동번역은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고 번역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똑같은 방식의 대응은 장한 일도, 칭찬받을 일도, 상 받을 일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른바 ‘호혜주의’에 입각한 계산된 사랑이나 평판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충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키기 어려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단 말일까요?
누가는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눅 6,35)고 합니다. 마태는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 5,45)고 합니다. 원수 사랑에 대한 큰 상은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는 명령을 덧붙임으로써, 원수사랑은 하나님의 품성에 참여하는 길임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나, 도덕적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영웅적 행위가 아닙니다. 상응하는 대가에 대한 기대 혹은 호혜주의에 기댄 계산된 행위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품성에 참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조건들을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폭력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 사랑을 명하심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폭력과 보복, 그에 대한 또 다른 보복폭력에 의해 규정된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원수의 종말이 아니라, 증오의 종말에서만 가능합니다. 원수는 제거될 수 있지만, 원한이 남아 있는 한 또 다른 원수가 언제든지 등장합니다. 원수는 증오를 불러오고, 다시 증오는 원수를 필요로 합니다. 원수가 없으면 증오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원수와 증오는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마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3)고 하는데 누가는 ‘이웃’이라는 개념을 단순하게 ‘원수’라는 개념으로 대치시킴으로써, 원수를 개인적인 적대자만이 아니라, 국가적, 종교적 원수에까지 확대시켰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원수 사랑이 언제나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원수 사랑의 마지막이 십자가형이었음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원수사랑은 필연적으로 고난과 죽음으로 인도했습니다. 집단과 집단 사이도 그렇지만, 개인적 원수 관계에서도 원수 사랑이 성공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많은 경우 어긋나고, 원수 사랑이 성공하여 원수관계가 친구관계로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환상으로 끝나는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나갔던 젤롯파, 아니면 로마 제국의 힘에 순응하여 기생했던 ‘평화의 당’이 훨씬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국의 힘보다 하나님 나라의 힘을, 증오보다 사랑의 힘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비록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신앙으로 예수님의 원수 사랑의 길을 따르는 삶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 가장 오래된 부활전승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는 씨앗과 열매의 비유를 들어, 뿌리는 씨앗이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하는 것처럼, 죽어야 사는 길이 부활임을 증언했습니다. 아니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 죽음 후에야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지요.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삶의 변화는 죽음과 같은 통과의례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행동은 마치 죽음과 같은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를 지나야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씨앗과 열매의 형태가 다르듯이, 부활 이전과 이후의 삶도 분명히 다릅니다. 부활 이전의 몸이 썩을 몸, 비천한 몸, 약한 몸, 자연적인 몸이라면, 부활 이후의 몸은 썩지 않을 몸,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신령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수를 미워하는 삶은 부활 이전의 몸, 썩고 비천하고 약하고 자연적인 인간의 모습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삶은 부활 이후의 몸처럼,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오히려 더 강하며, 신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15,50)고 말한 것입니다. 살과 피, 곧 육의 세계의 질서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3. 야곱의 아들, 꿈꾸는 사람, 요셉에게 원수가 있다면, 자기를 죽이려고 하다가(창 37,18), 차마 그러지 못하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스무 냥에 팔아넘긴 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창 37,28). 요셉은 그 원한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Ende gut, alles gut)라는 독일어 속담처럼, 결과적으로 기근으로 고통 받는 가족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길고도 놀라운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깨달음이 화해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이집트로 팔아넘겨진 후, 요셉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그가 당한 고통과 고난에 대한 분노와 형제들에 대한 증오가 한 순간에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된 것은 무슨 연고일까요?
요셉은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 45,5-8).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는 피해자였던 요셉이 자신이 겪은 고난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데서 가능했습니다. 그 의미는 고통과 고난에 대한 기억이 보복으로 나가지 않고, 모든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새로운 시작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사랑은 원수의 제거가 아니라, 적대관계의 제거에서 시작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하나님 나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서 결실을 맺습니다.
4. 올 해는 삼일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삼일운동은 당시 1,700만 명의 인구 중 무려 103만 명이 참여한 세계 초유의 혁명, 해외 이주민과 망명자들도 함께 만세를 외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1919년 3월과 4월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와 파업, 휴학 등은 모두 2,464건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시위는 1,692건이었습니다. 한 달여 동안 934명이 사망했고, 4만 6천 여 명이 투옥되었습니다. 삼일운동은 국내외 독립투쟁이 더욱 뜨겁게 전개되는 기점이 되었고, 두 달 뒤에 일어난 중국의 ‘5.4혁명’처럼 타국의 민중들에게도 용기와 저항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삼일운동은 혁명이 되었습니다. 대한제국(帝國)이 아니라 대한민국(民國)이 된 것이지요. 왕이 주인인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주인인 공화국이 되었으니 삼일운동은 명백하게 혁명이었습니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크고 작은 기념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6일, 와다 하루키 등 일본 지식인 226명이 삼일운동 100돌을 맞아, ‘2019년 일본 시민, 지식인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한-일 관계 발전의 열쇠’라고 밝혔습니다. 이 공동성명은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발표되었지만, 끊임없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하는 일본 정부, 특히 아베 신조 내각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일본 정부의 사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와 식민지배가 한국인의 뜻에 반하여 이뤄진 것이라고 밝힌 일본 총리의 2010년의 ‘간 담화’가 있었습니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는 27일,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공개적인 사죄를 표명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미 2015년 5월과 8월에 방한하여, 공개적인 사죄의 뜻을 밝혔던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93) 목사 등 일본 기독교 지도자 20명이 오는 3월 1일 개최될 예정인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 기념대회’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에 대한 과거사를 사죄할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방문단 단장인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93) 목사는 일본 기독교계의 큰 어른으로 1967년부터 일본의 양심적인 지성인들과 함께 사죄위원회를 조직해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가 한-일 두 나라 관계의 첨예한 현안으로 남아 있습니다. 갈등 속의 한-일 관계는 최근 일본초계기의 위협저공비행 등 군사 분야로까지 확대되어,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본 내 극우 집단의 ‘한국인 혐오’도 감정적 대립을 더 조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21일(2019년),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주변국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일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북한, 중국, 한국 순인 것으로 나타났고, 가장 좋아하는 나라는 영국과 미국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느 나라를 가장 싫어할까요? 2012년 갤럽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본, 중국, 북한 순이었는데, 2017년에는 ‘사드 한국배치’문제가 불거진 후, 중국, 일본, 북한 순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 순위가 바뀌기는 하지만, 한국에게는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과 일본이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깊고 넓은 상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적대적 관계가 기억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개인은 물론,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사 청산의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가해자는 사죄하고 용서를 빔으로써, 피해자는 용서하되 기억함으로써 화해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삼일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한-일 관계는 물론, 한국 사회 안의 분열과 갈등, 개인적 차원의 상처들이 치유되고 한층 더 성숙한 관계로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원수의 종말이 아니라, 증오의 종말을 지향하는 원수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품성(자비)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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