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넷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조회수   990
설교제목 더 요긴한 약한 지체들
성경구절 느헤미야기 8:1-3/ 고린도전서 12:20-27/ 누가복음서 4:14-21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1-27
전주 주 예수여 우리와 함께하소서(G. Boehm)
찬양1부 보라 놀라운 사랑을(Felix Mendelssohn Bartholdy)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위대하신 주님(Roland Diggle)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성도여 다함께 주 찬양하여라(B. Carr)
후주2부 성도여 다함께 주 찬양하여라(B. Carr)
성경본문 느헤미야기 8:1-3
모든 백성이 한꺼번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학자 에스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청하였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에스라 제사장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왔다. 거기에는,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나와 있었다. 그는 수문 앞 광장에서,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에게 새벽부터 정오까지, 큰소리로 율법책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린도전서 12:20-27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 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누가복음서 4:14-21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한 말입니다.

 

이로써 어린 왕자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서양 근대의 문을 열었지만, 지금은 ‘video, ergo est’(나는 본다. 그러므로 그것은 있다)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이 된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므로 가치도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미세먼지, 아니 미세독극물 때문에 고통 받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신선한 공기야 말로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버드대학의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먼저 제시합니다:

 

‘50만 달러가 있으면 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다. 6,250달러를 지불하면 인도 여성을 대리모로 아이를 낳게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죄수들이 하루에 82달러만 내면 교도소 내 감방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감옥이 있다. 그나마 가격이 매겨져 있는 것은 낫다. 명문대 입학 허가는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 안다. 반대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자신의 몸을 팔 수 있다. 이마에 광고 문신을 새기면 777달러를 받는다. 제약회사의 약물 안전성 실험대상이 되면 그 열 배인 7,500달러를 벌 수 있다. 용병으로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가하면 몸값이 10만 달러로 뛴다.’

 

오래 전에 출간한 책이어서, 그 사이 가격이 올랐겠지만, 하나 같이 예전에는 돈으로 살 수도, 살 수 있다는 생각도 아예 못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마이클 샌델은 시장가치가 교육, 환경, 가족, 가치, 건강, 정치 등 삶의 모든 영역 속으로 확대되어, 돈만 있으면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사고 파는 사회, 곧 우리 사회가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서 시장사회(market society)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시장경제에서 시장은 재화를 생산하고 부를 창출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기능하지만, ‘시장사회에서는 시장가치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일종의 생활방식이 된 것을, 아니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시장의 제도적 개선 이전에 시장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인데, 그것은 시장이 도덕적 가치와 공동체적 가치를 훼손하고 변질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이클 샌델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시장사회의 현실은 갈수록 도덕적 가치와 공동체적 가치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2.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느헤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전 539, 바빌로니아를 함락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놓은 고레스(주전 600-530)가 이듬해인 주전 538, 70년 동안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허용하는 칙령을 포고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하나님의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을 옛 유대 땅으로 되돌려 보낸 것, 그 후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된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 보수와 성벽 재건은 페르시아 왕들의 관대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제국의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목적의 결과였습니다.

페르시아는 가혹한 공납제도로 이스라엘 백성의 목을 졸랐고, 성전보수는 종교적 관용이라기보다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과 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한 의도로 허용되었고(6,10), 성곽 공사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발생했던 반란으로 제국의 안보에 위협을 느꼈던 중앙정부의 자구책이자, 유다를 이집트 정복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고레스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주전 530-522 재위)가 주전 525년 이집트를 침공하여 그 영토를 페르시아 제국으로 병합시켰고, 그 군사원정에 유대인들이 동원된 것과 그 후에 그들이 유다에 정착한 것에서 드러났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과중한 과세와 금은통화주의 정책은 제국의 변방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반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화폐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왕궁과 신전들에서 계산단위로 사용되면서 등장했습니다. 평민들의 일상적 경제는 신용을 통해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과 용병들이 전문직이 됨으로써 전리품 외에 급료를 지급해야 했는데, 기원전 600년 경 리디아(서부 소아시아 지역의 왕국), 인도, 중국의 권력자들이 거의 동시에 용병들과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동전이 유통되면서부터 평민들의 일상적 거래를 위한 시장과 화폐경제가 발전했고, 제국들도 조공을 화폐형태로 바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기초로 해서 화폐는 시장경제를 더욱 활성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의 교환과정에서 돈을 가진 사람이 상품생산자보다 더욱 힘을 갖게 되면서부터, 이것이 돈을 무한정 축적할 탐욕의 객관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유다 고지대들과 같이 페르시아 제국의 경제적 발판이 되었던 지역에서는 조공과 과세 부담이 더 심했고,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을 내기 위해 고리대금업자로부터 그들의 토지를 담보로 높은 이자율의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자녀들을 노예로 팔 수 밖에 없었습니다(5,4-5). 결국 고리대금업자들과 대토지 소유주들의 배는 불러갔고, 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통적인 농업경제관과 지파동맹의 공동체 의식이 파괴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페르시아 역사상 주목할 군주는 캄비세스 2세를 이은 다리오 1세입니다(주전 521-486 재위).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국경을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의 인더스 강과 서쪽으로는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확장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오늘의 이란 파르스(Fars) 지역 페레세폴리스에 수도를 건설하고 제국의 도로망과 정보망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20172월에 페레세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폐허가 되어 기둥과 벽만 남았지만, 그 궁전의 엄청난 규모와 벽에 새겨진 조공을 바치는 사신들의 행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과세 징수제도를 확립하고, 토착민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그가 지방 법전들을 수집해서 문서화하고, 그것을 페르시아의 제국법과 더불어 집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오경으로 형성된 율법들을 편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로 이런 시기에 유다로 귀향,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면서,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했던 인물들입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자 학자였지만(7,11), 느헤미야는 평신도로서 나라를 새롭게 세워야 할 개혁 정치가였습니다.

 

본래 페르시아 왕궁의 술 관원’(1,11)이었던 느헤미야는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으로부터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고생이 아주 심하고, 업신여김을 받고 있고,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다(1,3)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하여, 3차 귀향민들과 함께 주전 445년에 귀향,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총독이 되어 12년 동안 재임하면서(주전 445년부터 432년까지), 그는 예루살렘 재건사업을 펼쳤습니다.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의 온갖 방해와 협박에도 불구하고(6,9; 6,19), 또 유다의 충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페르시아 제국의 눈치를 보면서, 그는 성전 공사를 완공함으로써 성전을 중심으로 유다 공동체의 기강을 바로 잡았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지 꼭 70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전은 복구되었지만, 유다 사회의 분열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하여 옛 토지소유권을 주장하는 상류층의 후손들과 남아서 폐허가 된 땅을 다시 일구면서 어렵게 생존해온 토착민들 사이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경제는 파탄상태였고, 페르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과 동화주의자들 사이의 다툼도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유다 사회의 양극화였습니다. 주전 500년경에 실시되었던 다리오 1세의 화폐개혁으로 인한 대여자본주의, 고리대금(5,10-11), 조공과 세금 강화는 유다의 전통적인 농업경제를 몰락시켰습니다. 잇따른 자연재해와 전쟁도 소농의 몰락을 재촉했지만, 빚을 갚을 길 없어 토지를 빼앗기고 노예로 전락한 농민들과 대토지를 소유한 신흥 지주계층 사이의 양극화는 사회적 불안을 더 조장했습니다(5,3-5).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가 귀환하는 유다인들과 폐허가 되었지만 70년 동안 주인 없는 땅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 전쟁으로 이주해온 외국인들 사이의 사회적 갈등도 심했습니다. 귀환한 이들은 남아있던 이들과 외국인들을 사마리아인들로 비난했고, 우상숭배자들, 거룩한 피를 더럽힌 잡종들로 매도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전 보수가 완성된 후, 반세기가 되었을 때, 엄격한 율법의 적용과 개혁을 통하여 유다 공동체를 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외국 세력에 의해 멸망한 것은 하나님에게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외부의 세력을 도구삼아서라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약속에 신실하신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증거 했습니다. 다시 말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다 공동체가 위기에 닥칠 때마다, 예배와 말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순종을 통해 개혁을 시도했고, 유다 민족은 회개하고 새로운 계약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조정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예루살렘의 총독이었기 때문에 개혁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느헤미야는 부자들에게 완전한 부채 탕감을 해주도록 하여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계약을 갱신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전면적인 참여로 토라를 도입했고, 비로소 유대 사회는 자율과 평등의 새로운 질서를 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수가 착취를 당하고, 소수의 대토지소유주들이 축재하는 일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헬레니즘 제국들이 들어서기 전까지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유다는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빌론 포로기와 예루살렘 귀환 후 수집되고 편집된 5경에 들어있는 규정들, 특별히 계약법전(21-23)과 신명기법전에 나오는 희년법, 안식년법 등의 법정신, 곧 빚의 탕감과 휴경, 귀향 등은 구조화된 악을 극복하려는 당대의 희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화폐, 사유재산, 고리대금이 노동의 분업화와 함께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던 주전 8세기 후반과 7세기 전체에 걸쳐 위대한 예언자들의 저항도 강력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그리고 이 희망과 저항은 예수님에게도 전승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악마의 시험을 받으시고, 성령의 능력을 입고 나사렛으로 돌아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의도적으로 611절부터 2절까지의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4,16-17). 안식일을 회당에서 거룩하게 지키고, 말씀을 낭독하는 일은 예수님이 늘 하시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을 찾아 읽으셨다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말씀에 빗대어 자신의 공생애의 시작과 목적을 알리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4,21).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빚진 사람들에게 빚의 탕감이(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이),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이,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이 선포되고, 주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된다는 것입니다(4,18-19). 그런데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의도적으로 한 문장을 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는 은혜의 해는 회개와 치유, 자발적 절제와 나눔으로 채워지는 것이지, 보복과 그에 대한 대응보복의 악순환으로는 결코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한 것일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 희년은 레위기 25장에 들어있습니다.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후, 50년이 되는 해, 뿔 나팔을 불면서 거룩한 해’, ‘기쁨의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유산으로 분배받은 땅, 가족에게 돌아가며, 부당한 이익을 남겨서는 안 되고, 나그네와 임시 거주자들도 함께 살 수 있어야 했습니다.

 

빚의 탕감과 휴경 전통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근동의 고대 국가들에도 있었던 전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고대 국가들에서 휴경은 더 많은 소출을 얻기 위한 농업 경제적 목적에서 시행되었고, 빚의 탕감 혹은 사면은 권력교체와 왕의 즉위와 관계된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안식년과 희년 제도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신앙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농경사회의 소출은 그리 충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라도 더 일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에서 하루를 온전히 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노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후 쉬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일에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많은 이들에게 주일을 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복잡해진 우리 시대에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위기의 희년법이 그 내용은 대단히 혁명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실현방식이 비혁명적이라는 것입니다. 희년이 속죄의 날에 선언된 것과 부자와 권력자들의 자발적인 욕망의 절제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부자와 권력자들의 기득권의 포기는 속죄의 열매이고, 가난한 민중의 기본권의 회복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씨앗이라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권력자든 사회적 약자든, 우리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면, 공멸할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자발적이고도 기쁨으로 욕망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위기에 함께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희년법이 말하는 개혁과 변화의 목적은 적의 말살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시작, 곧 공생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년법은 혁명적이지도 수구적이지도 않습니다. 진보냐 보수냐, 혁명이냐 수구냐, 변혁이냐 안정이냐, 환경이냐 발전이냐 라는 이분법적 양자택일은 더 이상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도 되지 못하고, 현실적인 대안도 되지 못합니다.

 

비록 희년법이 이스라엘의 역사상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실천되었지만 희년법은 양극화된 이스라엘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꿈을 가진 이들의 이념이 되었습니다.

 

이사야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선포된 희년은 세계사적이고 종말론적 성격을 가집니다. 희년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실현된 사건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 선포와 악령 축출과 병자들의 치유를 통하여,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희년을 이미 현재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곳에 희년, 곧 은혜의 해는 현실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희년 선포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희년 실천의 주체여야 합니다. 스스로 희년정신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희년을 선포할 수 없겠지요.

 

 

4.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을 빗대어 공동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할 수 없습니다.’(고전 12,20-21).

보아도 손이 없으면 잡을 수 없고, 손이 있어도 볼 수 없으면 찾을 수 없으니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요. 몸을 오직 쓸모의 시각에서 보는 것도 문제지만, 몸은 상호적이지 결코 단독적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덧붙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고전 12,22).

그렇지요. 요긴하지 않은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약해서 쓸모없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서 무시하는 부분, 가려져 있고 더러워서 하찮게 여기는 발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다 잘 압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고전 12,26). 그래서 하나님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같이 걱정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분열을 극복하시고,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조화를 이루게 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심으로써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 더 아름답게 꾸며 줌으로써’(고전 12,24)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는 양극화입니다. 특별히 소득격차에 따른 빈부 양극화가 그것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 몸과 지체에 대한 비유는 교회 안에서의 양극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양극화의 극복에도 흥미로운 상상력을 줍니다.

 

계층간 균형과 조화는 약한 자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심으로써,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 풍성한 배려, 법적, 제도적 장치를 포함한 사회적 관심과 존중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해방신학은 이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optio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부자와 힘 있는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해야 할까요? 레위기 성결법전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을 받고 외부의 적에 의해 공멸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우리 시대의 양극화, 그것이 경제적이건 정치적이건, 이념적이건 계층적이건, 성적이건 세대적이건, 어떤 형태의 양극화든 성경이 제시하는 극복 방안은 그 내용은 충분히 혁명적인데, 방법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양극화의 극복은 절제와 양보, 배려와 나눔이라는 비폭력적이고 자발적인 자기 변화에서 시작한다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의 정치경제학은 현실주의자는 물론이고 급진주의자는 더더욱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희년의 정치경제학은 현실주의자들에게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급진적 개혁가들에게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치경제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 아니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가치(55,1-3)를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11,1) 하나님의 구원언약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언약에 대한 믿음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어린 왕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믿음 없이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이 믿음 없이 우리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고, 이 믿음 없이 우리는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해도 함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아도 함께 기뻐하지 못할 것입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예배일 절기 설교제목 설교자
1303 2025-07-13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네가 무엇을 보느냐 권영림 목사
1302 2025-07-06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예루살렘에 평화가 넘치게 임영섭 목사
1301 2025-06-29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 임영섭 목사
1300 2025-06-22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임영섭 목사
1299 2025-06-15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서울주교좌성당)    누구를 위한 상속인가? 임영섭 목사
1298 2025-06-15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경동교회)    주님과 함께 춤을... 박성순 신부
1297 2025-06-08 성령강림주일    하나님 안에서 임영섭 목사
1296 2025-06-01 부활절 일곱째 주일    하나님의 의 임영섭 목사
1295 2025-05-25 부활절 여섯째 주일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임영섭 목사
1294 2025-05-18 부활절 다섯째 주일    하나님의 집 임영섭 목사
1293 2025-05-11 부활절 넷째 주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임영섭 목사
1292 2025-05-04 부활절 셋째 주일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김진 목사
1291 2025-04-27 부활절 둘째 주일    복음의 대가 임영섭 목사
1290 2025-04-20 부활주일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임영섭 목사
1289 2025-04-13 종려주일    장애를 가진 하나님 임영섭 목사
1 2 3 4 5 6 7 8 9 10 ... 87
전체 메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