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셋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조회수   446
설교제목 성령의 은사들
성경구절 이사야서 62:1-5/ 고린도전서 12:1-11/ 요한복음서 2:1-11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1-20
전주 빛 되신 주 예수(S. Scheidt)
찬양1부 주 찬양하라(Evertt Titcomb)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만유의 주재(Z. Reissner)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햇빛을 받는 곳마다(J. Hatton)
후주2부 햇빛을 받는 곳마다(J. Hatton)
성경본문 이사야서 62:1-5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이방 나라들이 네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뭇 왕이 네가 받은 영광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에, 주님께서 네게 지어 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또한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너를 두고 '버림받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너의 땅을 일컬어 '버림받은 아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너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 이라고 부르고, 네 땅을 '결혼한 여인' 이라고 부를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너를 좋아하시며, 네 땅을 아내로 맞아 주는 신랑과 같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너의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며,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께서 너를 반기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11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요한복음서 2:1-11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였다.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 그래서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였다.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


1. 주전 538, 페르시아의 건국 군주 고레스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관한 칙령을 반포하고,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향을 허락했습니다. 그 이듬 해, 새로운 희망을 안고 귀국한 일단의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의 기초를 놓았지만, 경제적 궁핍은 극에 달했습니다.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남아있던 백성들 사이의 갈등으로 사회도 무질서했기 때문에 성전 재건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귀환자들의 처지는 가난과 곤궁과 환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불의와 약탈로 인한 경제적 곤궁(61,8; 62,8-9), 정치적 불안정(60,10-18), 황폐하게 된 토지(61,4), 점점 가중되는 수치와 모욕 받는(61,7; 62,4)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3이사야라고 부르는 예언자, 이사야서 56장부터 66장까지의 저자인 이 예언자는(활동시기 주전 537년부터 515년 사이) 놀랍게도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빛이 비치면, 예루살렘은 이방 나라들이 그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들이 떠오르는 그 광명을 보고 올 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60,1-3).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고, 상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치유 받고, 포로들에게 자유가 선포되고, 갇힌 사람들에게 석방이 선언된다는 것입니다(61,1). 주님께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화관을 씌워주시고,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61,3).

 

이스라엘 백성의 절망적인 현실과 약속된 구원의 미래를 제3이사야는 혼인에 빗대어 선포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향했으나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림받은 자’, 전쟁과 약탈로 폐허가 된 이스라엘 땅을 버림받은 아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약속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 이스라엘 땅을 결혼한 여인이라고 부르면서(62,4), 3이사야는 구원을 혼인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신랑에게 제사장의 관을 씌우듯이,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이, 주님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의의 겉옷으로 둘러 주셨으니,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61,10).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너의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며,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께서 너를 반기실 것이다.’(62,5).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구원을 혼인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오래된 전통입니다. 호세아, 예레미야, 에스겔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신랑이나 남편으로 묘사합니다. 특별히 아가는 신랑과 신부의 성적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빗대어 노래한 가장 잘 알려진 책입니다. 너무 선정적이고 노골적이라는 이유로 정경 채택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지만, 신부가 이스라엘 백성 혹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양해되어 정경 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서 안에서도 구원이 혼인잔치의 기쁨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유하셨고(22,2-14), 혼인 잔치에서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셨습니다(25,1-13).

그 후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 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는 혼인관계에 있는 신랑신부의 관계에 빗대어 노래되었습니다. 이슬람에도 사랑의 신비주의 전통이 초기부터 있었습니다. 7세기 바스라의 여자 노예이자 신비주의자였던 라미아 알 아다위야(717-801)가 그 사람입니다. 그녀는 한 손에 물동이를, 다른 한 손에 횃불을 들고 다녔습니다. 까닭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아 천국에 대한 희망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분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기도하도록 지옥에는 물을 쏟아 붓고 천국에는 불을 질러 그 두 개의 장막이 사라지게 하려하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혼인관계에 빗대어 노래된 것은 무엇보다 혼인으로 상징되는 일체감, 친밀성,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독일어로 혼인을 ‘Hochzeit’라고 하는데, 한 사람의 삶에서 절정의 순간’, 다시 말해 가장 결정적인 시간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 속담에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소에 가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을 행복하려면 말을 사서 타고, 일 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짓고, 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결혼이 겨우 일주일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좀 너무한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은 이혼율도 높고, 아예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혼인에 그렇게 높은 비중을 두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관습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지요. 그러나 혼인으로 상징되는 일체감, 친밀성, 기쁨은 인간관계는 물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성서적인 방식입니다.

 

 

2. 그래서 요한복음서 기자도 예수님의 첫 번째 표징을 갈릴레아의 가나에서 열린 혼인잔치를 그 배경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9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가나에서 혼인식이 열렸습니다. 유대인들의 혼례는 일반적으로 신랑의 친구들이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가 만찬을 함께 하며 7일간 지내는 것으로 거행되었습니다(29,27-28; 14,12).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가나의 혼인잔치에 이미 계셨다는 요한의 보도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신랑의 숙모였다는 외경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이 신랑과 친척관계였기 때문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잔치는 시작되었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치가 일주일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답변하십니다.

 

이런 답변은 매우 무례한 책망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 호칭은 모자관계를 거부하거나 경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여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정상적인 호칭이었고(15,28; 13,12; 4,21; 8,10; 20,13), 헬라 문헌에도 이런 용례가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히려 주목할 것은 어머니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4)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어떤 성서학자는 때가 오기 전까지는 어머니도 아들에 대해서 아무런 주장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형제들의 훈계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거부합니다(7,6). 예수님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의존한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어머니도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와 십자가 아래 외,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고, 마리아라는 이름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리아가 예수님의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그 는 언제 오며, 어떤 일이 일어나는 때란 말일까요? 요한에게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과 영광 가운데서 높이 올리우심을 받는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현시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표적을 거부하신 예수님, 그러나 곧바로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신 후,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요한은 이 첫 번째 이적으로 예수님이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 이적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연구자들은 요한복음의 성격을 한 마디로 표징의 책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일곱 가지의 표적이 등장합니다.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이적(4,46-54), 갈릴리 바닷가에서 많은 무리를 먹이신 이적(6,1-15), 물 위를 걸으신 이적(6,16-21), 예루살렘 양의 문곁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의 치유(5,1-15),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의 치유(9,1-41),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38-44),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이적(2,1-11) 등이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여섯 가지 이적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데, 오직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적만이 공관복음 전승에 정확한 병행이 없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는 이적 이해에 대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이적들은 근본적으로 시간 안에 임한 하나님의 통치에 수반된 능력 있는 행위들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이적 같은 어떤 이적들은 구약성서의 예언 혹은 약속이 성취되는 사건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적의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요한은 표징’(세메이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표징눈에 띄는 표시나 상징, 혹은 신호를 뜻합니다. 방패 위에 그려진 문장이나 혹은 반지에 있는 인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관찰되지 않은, 혹은 관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추론의 관찰 가능한 근거를 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표징은 놀라움과 결합하여 나타나고, 그 원초적 의미는 기적입니다(4,8). 그러나 표징은 비기적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는데,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의 일부였고(66,19), 예언자들은 표징을 미래의 위대한 현실을 미리 상징적으로 선취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은 어떤 미래를 상징적으로 선취하는 것일까요?

 

혼인 잔치 자리,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할 기쁨의 자리에서 오래된 포도주는 떨어졌습니다. 이제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이전 시대는 지나갔고, 새 시대가 왔습니다. 이전 시대는 옛 포도주와 함께 없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포도주가 넘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통하여, 물이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 기적이야기를 통하여 예수의 영광이 유다교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음이 분명합니다. 물 항아리에 들어있던 물은 유다교 정결예법에 따른 정화의 기능을 가진 것이라면, 그 율법의 물이 이제 복음의 포도주로 변한 것이지요. 이로써 예수님은 유다교를 성취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그리스도로서 제자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3. 표징이 믿음의 원인이라면, 성령의 은사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직접적인 개입이라는 이적의 의미를, 다른 한편으로는 표징으로서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신령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신다고 합니다(고전 12,8-10).

신령한 은사가 이적이건, 표징이건, 중요한 것은 그런 모든 다양한 은사는 한 분이신 성령이 주시는 것이고, 받은 은사들은 교회에 덕을 끼치고(고전 14,12), 남에게 덕이 되게 하여(고전 14,26), 공동의 이익을 위해(고전 12,7), 주어진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2,11).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은사 문제, 특히 방언의 은사를 중심으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 있던 초대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위로받고 신앙의 확증을 얻으며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사를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 은사의 다양성이 오히려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 사이에 차별의식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고(고전 12,4),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시며(고전 12,5),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한 것입니다(고전 12,6).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실 모든 삶 자체가 성령의 은사입니다. 일반적으로 은사로 번역되는 카리스마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 권위를 가진 행동 등으로 쓰이지만, 본래 카리스은총, 아름다움, 친절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좁은 의미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해가기 위한 친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주시는 것은 신앙공동체의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은사를 사유화하거나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은 차이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은사의 다양성은 오히려 봉사의 풍요로움의 기초가 되어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4. 오늘은 세계교회협의회(WCC) 신앙직제위원회와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가 지난 1968년부터 해마다 지켜오는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주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한 대표적인 성서적 전거는 요한복음 17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기 전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그것은 제자들의 하나 됨, 교회의 일치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17,21).

 

그러나 지난 2천년 동안의 교회의 역사는 어땠습니까? 아니 오늘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교회는 인종과 피부색, 국적과 체제, 계급과 계층, 성과 나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앙과 신학의 차이, 소유와 소득의 차별, 정치적 입장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서도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회의 분열을 스캔들’(걸림돌)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일치가 세상으로 믿게 하는 것인데, 교회의 분열이 세상으로 믿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니, 교회의 분열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라는 것이지요.

아니, 어찌 교회들 사이의 분열만이겠습니까! 한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어찌 갈등과 분열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의 분열은 공동체 내부의 갈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문제로만 끝나면 그것도 다행입니다. 그러나 분열은 선교에도 걸림돌이 됩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고, 안 믿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교파들 사이, 또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의 갈등과 분열의 근본에는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놓여 있습니다. 교파의 분열은 대부분 교리나 신학적 은사의 차이 혹은 재산권 다툼에서 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분열은 섬기기 위해 주어진 은사를 섬김을 받는 은사로 오해하는데서 비롯됩니다.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은사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은사이든, 진정한 은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에 덕을 끼치기 위하여 갈구되는 은사만이(고전 14,12),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카리스마는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리스마는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부정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은사가 과연 성령이 주시는 것인지, 아니면 악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영을 분별하는 은사도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고전 12,10).

 

그러므로 영을 분별하는 성령의 은사를 힘입어,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늘의 징조만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들을 분별할 수있어야 하겠습니다(16,3). 숱한 소문과 온갖 가짜 뉴스들에 휘둘려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드러난 현상과 표징만 보지 않고 그것이 가리키는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는, 그리고 그 표징이 가리키는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댓글

번호 예배일 절기 설교제목 설교자
980 2019-07-28 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채수일 목사
979 2019-07-21 성령강림후 여섯째주일    많지 않거나 하나뿐인 주님의 일 채수일 목사
978 2019-07-14 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    이생과 영생 채수일 목사
977 2019-07-07 성령강림후 넷째주일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니 채수일 목사
976 2019-06-30 성령강림후 셋째주일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채수일 목사
975 2019-06-23 성령강림후 둘째주일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 채수일 목사
974 2019-06-16 성령강림후 첫째주일    하나님은 관계다 공미화 목사
973 2019-06-09 성령강림주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교환예배 (서울주교좌 성당) 채수일 목사
972 2019-06-09 성령강림주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교환예배 (경동교회) 주낙현 신부
971 2019-06-02 부활절 일곱째주일    선교-세상이 믿고, 알게 하기 채수일 목사
970 2019-05-26 부활절 여섯째주일    아버지의 기쁨 테오 순더마이어 목사
969 2019-05-19 부활절 다섯째주일    하나님이 계신 곳에 속(俗)된 것은 없다 채수일 목사
968 2019-05-12 부활절 넷째주일    권능과 힘은 하나님께 채수일 목사
967 2019-05-05 부활절 셋째주일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채수일 목사
966 2019-04-28 부활절 둘째주일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 채수일 목사
1 2 3 4 5 6 7 8 9 10 ... 66
전체 메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