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언약의 특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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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말라기서 3:1-4/ 빌립보서 1:4-6, 8-11/ 누가복음서 3:1-6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8-12-09 |
전주 | 이새의 뿌리에서(J. Brahms) |
찬양1부 | 오 시온아 널리 전파하라(J. Stainer)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곧 오소서 임마누엘(J. Rutter)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영원한 문아 들릴지어다(T. Williams) |
후주2부 | 오랫동안 기다리던(R. H. Prichard) |
성경본문 |
말라기서 3:1-4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나 주를 기쁘게 할 것이다. 빌립보서 1:4-6, 8-11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늘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첫 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누가복음서 3:1-6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 저자인 말라기가 누구인지, 우리는 말라기서 자체에서 그의 개인적 삶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말라기’라는 단어가 ‘나의 사자’라는 보통명사라는 것, 말라기 3장 1절에서 그를 ‘나의 특사’(Messenger/Boten)로 지칭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말라기가 자신을 ‘주님의 특사’로 이해한 예언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라기 예언자는 어떤 과제를 가지고 파견된 특사였을까요? 말라기서 1장 1절에 의하면 말라기 예언자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논쟁하기 위하여 파견하신 특사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예언자 말라기는 자기 백성에게 어떤 경고를 해야 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말라기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말 1,10)과 사마리아에 총독이 있었다는 말씀(말 1,8)에 비추어, 우리는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기를 주전 515년 이후로 잡을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유다로 귀향,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으나, 기대했던 구원예언들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경제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실망은 절망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다는 주전 518년에 도입된 새로운 조세 체제를 따라 농산물 공물과 은으로 된 세금을 당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히스타스페스(주전 522-486)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는 은광이 없었기 때문에, 포도와 올리브 등 농업으로 얻은 잉여생산물을 페니키아와의 원거리 무역을 통해 은으로 교환하여 바쳐야 했습니다. 바벨론을 이어 페르시아의 식민지배를 받는 유다 사회는 사회적 불평등으로 양극화되었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과 불법적 부의 획득으로 부패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말라기서는 이렇게 보도합니다:
‘점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로 넘쳐났습니다(말 3,5).
우상숭배, 성적 타락, 사기와 착취,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이방인을 학대하는 이 모든 일의 근원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이 있다는 것이 말라기 예언자의 인식이기도 하고, 성경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사회적 현상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고, 모든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은 신앙인의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 경제난, 양극화, 남북과 남남갈등, 청년실업, 묻지마 폭력, 외국인 노동자 차별, 성차별, 난민 혐오, 미세먼지,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나름대로 분명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모든 사태의 근본원인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서 찾는 것은 정확한 원인을 찾고,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모든 사회적 문제의 깊은 근원에는 결국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이 있다고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물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벌하고, 선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믿음이 없는 곳에는 맘몬이 우상으로 숭배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악해지면 윗물부터 썩기 시작합니다. 말라기 예언자 시대, 제사장들이 그랬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인데,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다.’(말 1,6). 제사장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지만, 그들은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고, 눈먼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치면서,’(말 1,6-8), ‘주님께 차려 드리는 상쯤은 더러워져도 괜찮아!’ 하면서 자신들도 싫어하는 음식을 제물이라고 바침으로써, 그들의 악한 행실을 정당화했습니다.
제사장들이 그런데 하물며 백성이야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도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남자들은 유다 아내를 학대하여 버리고, 이방 우상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하여 재산을 늘리려고 했습니다.(말 2,11-16). 게다가 십일조와 헌물을 탈세하여 하나님의 것을 훔쳤고(말 3,8), 불손한 말로 하나님을 거역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말 3,13-15).
말라기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유다는 제사장 집단의 타락으로 야훼 예배는 변질되어 형식적으로만 드려졌고, 정직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와 체념, 그리고 모두가 모두에게 경쟁자가 된 세상에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불손한 태도가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 예언자 말라기는 유다 제사장들과 백성들과 논쟁을 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두고 논쟁이 전개됩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백성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으면서 시작됩니다.(말 1,2). 에서와 야곱의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역사적으로 논증하지만, 유다 백성은 지금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따집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백성에게는 오직 지금 여기, 곧 현재만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를 극복할 믿음의 원천으로 생각하면서, 미래 전망을 위한 디딤돌로 생각하기보다, 오직 현재, 그것도 오직 자신만의 현재가 중요할 뿐입니다.
두 번째 논쟁은 제사장들과의 논쟁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더러운 제물을 바치면서 사욕을 채우는 지도자들과의 논쟁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 제단을 더럽혔습니까?’하고 되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니 백성에게 뻔뻔하고 무례할 수밖에 없지요.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고, 거짓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자신이 거짓을 행하고 있다는 것도 망각합니다. 지도자들의 뻔뻔함과 무례함, 한 나라가 망하는 첩경입니다.
세 번째 논쟁은 백성들과의 논쟁입니다. 창조주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조상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욕되게 한 것이지요. 성소를 더럽히고, 유다 아내를 학대하여 버리고, 이방 우상을 섬기는 여자들과 결혼함으로써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제단에 제물을 바쳤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에 충격을 받아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주님의 제단을 적시면서,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말 2,13-14)하고 항의합니다.
오직 이익만이 유일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된 유다 백성은 종교적 제의와 이웃 사랑이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아니 신앙생활이든 결혼생활이든 그 기준이 오직 자신, 자기 이익이었기 때문에, 이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제사도 편의적으로 드리고, 아내도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편의적인 신앙생활은 불신앙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입니다.
네 번째 논쟁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논쟁입니다.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신다. 주님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하고 말하고, 또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하고 비아냥거립니다.(말 2,17).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잘나가는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의 한숨입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하나님은 공의롭게 재판하시고, 선을 행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깊은 회의이지요.
다섯 번째 논쟁은 회개에 대한 논쟁입니다. 훔친 하나님의 것,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고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도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신다는 것입니다.(말 3,7-8). 회개, 곧 주님께 되돌아가는 길은 구체적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만큼이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사람들에게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했고, 세리에게는 ‘정해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고, 군인들에게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눅 3,10-14)고 말했던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만이 아니라 몸과 일상생활의 변화에까지 이릅니다. 그렇지 않은 회개는 단지 관념적 카타르시스입니다.
마지막 논쟁은 불손한 말로 하나님을 거역한 것에 대한 논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말 3,14-15).
욥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악한 자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악한 자들은 자기들을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이렇게 살면 되지,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무엇이냐고 한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이기에 그를 섬기며, 그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한다.’(욥 21,7-15).
시편 73편의 시인도 같은 상황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그런 고통이 악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 옷이다....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란 말인가?’(시편 73,5-13).
말라기서에 나오는 유다 백성이나, 욥, 시편 73편의 시인은 모두 같은 현실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계명을 지키며, 착하게 사는 것이 아무 유익도 없다는 실망과 회의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백성과의 논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여섯 가지 질문에 대하여 자기 백성과 논쟁을 하십니다. ‘논쟁하시는 하나님’, 신이 자기 피조물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절대자이자 초월자이며 창조주인 신이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다른 종교전통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기꺼이 자기 백성과 논쟁을 하십니다. 논쟁은 자신의 정당함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나 협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논쟁은 언약에 대한 회상이자, 회개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은 자신의 특사를 보내심으로써 하십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주님 오시는 길을 닦는 언약의 특사’였고,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사명을 위임받은 특사였으며(눅 3,4-6),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은 특사였습니다.
특사는 자기 이름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보낸 이의 이름으로, 자기를 보낸 이가 맡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일이 특사에게 권위와 기쁨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언자 말라기의 최후를 알지 못하지만, 자기 동족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과 저주를 예언해야 했던 예언자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목을 분봉왕 헤롯의 생일축하잔치 상에 올려야 했고(마 14,8-10),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원하지 않았던 같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밀고로 참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이들은 특사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자기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을 때, 언제든지 자기를 보내신 분의 이름과 보내심의 뜻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내신 분의 ‘언약’을 전하는 하나님의 특사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그 날이 오면,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버릴 것’이고(말 4,1),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말 4,2)이라는 약속이며,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되고, 굽은 것은 곧게 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눅 3,6)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언약의 특사’입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노래했던 것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발’, ‘평화가 왔다고,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외치면서 달려오는’ 특사입니다.(사 52,7). 우리는 특사에게서 특사 자신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을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특사의 영광이고, 그것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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