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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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예레미야서 8:18-9:1/ 디모데전서 2:1-7/ 누가복음서 16:1-13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9-22 |
전주 | 주께 감사드리나이다(G. F. Händel) |
찬양1부 | 여호와께 감사하세(백경환)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할렐루야 추수 감사하세(조아름)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다 감사드리자(arr. S. Vaan) |
후주2부 | 다 감사드리자(S. Karg-Elert) |
성경본문 |
예레미야서 8:18-9:1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 땅에서 들려 온다. (백성이 울부짖는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온을 떠나셨단 말인가? 시온에는 왕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백성이 또 울부짖는다.) "여름철이 다 지났는데도, 곡식을 거둘 때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구출되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느냐? 그 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 디모데전서 2:1-7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적절한 때에 그 증거를 주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증언하도록 선포자와 사도로 임명을 받아 믿음과 진리로 이방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참말을 하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서 16:1-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청지기 하나를 두었다. 그는 이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불러 놓고 말하였다. '자네를 두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 된 일인가? 자네가 맡아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그 일을 볼 수 없네.' 그러자 그 청지기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낯이 부끄럽구나. 옳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다. 내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날 때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조치해 놓아야지.'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묻기를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였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받아서,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인들 내주겠느냐?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1.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딤전 2,1). 초대교회에 권면한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보기도와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 2,4).
그러나 이런 기도하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회가 이념과 계급으로 분열되고, ‘20대 80’의 양극화가 고착되어, 사실과 주장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넘쳐나는 가짜뉴스들이 증오를 부추겨, 오직 적과 아군만이 있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한 편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친구들만이 아니라, 적들도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도록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도록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특별히 요청되는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구원을 얻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보다 먼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인식은 다릅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진실을 안다고 해서, 온갖 지식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왜곡될 수 있고, 진실은 감추어질 수 있고, 지식은 악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고 해서, 또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를 잘 보여주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딤전 2,2),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지 않는 예언자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렘 8,6),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는 서기관들(렘 8,8), 백성을 속이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렘 8,10), 활을 당기듯 혀를 놀려 거짓을 일삼는 자기 백성도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이들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3. 누가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른바 ‘불의한 청지기’도 그런 사람입니다. 이 비유는, 부자 주인에게서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할 처지에 놓은 청지지가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 문서를 바꾸든지 다시 작성하여 자기 몫의 이자 분을 탕감해주고, 해고 후의 자기 생활을 보장받으려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소제목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되어 있어, 독자는 이 청지기가 나쁜 사람이라고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이 받아야 할 원금과 이자를 건드린 것이 아닙니다. 재산관리인으로서 그에게 할당된 정당한 자기 몫의 이자를 삭감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인은 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것입니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도 이 슬기로운 청지기처럼, 세상의 재물을 자선에 사용하여 친구를 얻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눅 16,9),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세상의 자녀들보다 더 충실하고 슬기롭게 관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신 것이지요.(눅 16,10). ‘새번역’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눅 16,9) 또는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눅 16,11)고 번역했으나, 이 단어의 뜻은 ‘부정직하게 획득한 재물’이라는 의미보다는 ‘세상적 재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누가는 ‘세상적 재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참된 재물’에도 충실하지 못할 것임을(눅 16,11), 그리고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몫도 받지 못할 것(눅 16,12)이라고 함으로써. 재물을 성속(聖俗)의 시각에서 이해하지 않고, 청지기로서의 충실함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 자신의 노력과 노동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세상적 재물’은 물론 ‘참된 재물’, ‘자기 것’에는 물론 ‘남의 것’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공연히 남의 것을 부러워하거나, 탐하지 않고, 자족에서 오는 행복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맡겨주신 참된 재물, 곧 자연이 준 모든 선물을 감사로 받고, 자연을 지키고 보전하는 일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4. 그런데 이 비유의 끝에서 주님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눅 16,13)고 말씀하십니다.
재물로 번역된 ‘맘몬’의 어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가장 적절한 설명은 이 단어가 어근(mn, 견고하다)의 명사형(maqtal, 장소를 나타내는)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히브리어의 사역동사는 ‘heemin’, ‘믿다, 신뢰하다’입니다. 그러므로 ‘맘몬’은 ‘신뢰하는 대상’이라는 뜻이 되어, 돈이나 소유로의 의미론적 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돈입니다. 돈은 견고한 안정만이 아니라, 자유도 줍니다. 그래서 보이는 맘몬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이에서 사람은 언제나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재물을 미워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라거나, 하나님만 떠받들고 재물은 업신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앞서 있었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가르침에도 어긋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재물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금욕주의적 수도자들이 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맘몬 숭배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길로 인도하는 현실로부터 제자들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단지 말씀하신 것이지요.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흔들리는 제자들, 하나님은 이런 제자들도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할 위치에 있지 않은 소시민인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큰 재물 때문에 믿음을 버리거나, 믿음 때문에 큰 재물을 포기해야 하는 시험에 빠지는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만일 그런 자리에 있게 된다면, 하나님과 맘몬 사이의 선택은 전적으로 은혜의 결과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지요. 은혜 아니고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 없고, 은혜 아니고서는 우리가 가진 재물을 감사와 함께 이웃과 나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혜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진리이고, 우리를 구원, 곧 자유에로 인도하는 진리입니다.
5. 저는 농부가 아니어서, 가을이 주는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일에 다만 소비자로서 참여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우리가 거두는 수확은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포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시작, 결실이라면, 자연에게는 끝이자 낙엽인 셈이지요. 시작과 끝은 결국 같은 것이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에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저의 추수감사입니다.
그 가운데 제가 거둔 영혼의 추수가 하나 있다면,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기, ‘묵상’(2019년, 돌베개)을 읽은 것입니다. 유럽의 수도원들을 찾아간 이야기이지요. 먼저 도착한 로마 근교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에서 그는 묘지와 수도원 사이의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카타콤베가 순교자들이 ‘스스로 삶의 경계를 달리하여 거주하는 곳이며 이로써 평화를 얻은 곳’이라면, 수도원은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추방한 사람들의 공간’, 수도자들이 ‘세상 모든 인연을 끊어 평화를 얻은 곳’이라는 것이지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삶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순교자),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추방한 사람들이(수도자) 도달한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진실로 자유한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한 사람들, 돈과 명예, 모든 형태의 성취욕, 마침내 자기 목숨으로부터도 자유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지요.
건축가 승효상은 순교자도 아니고, 수도자도 아니지만, 자유의 도상에서 평화를 찾은 인물을 소개합니다. ‘희랍인 조르바’의 작가로 알려진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 그러나 ‘최후의 유혹’으로 신성모독죄로 파문당하여, 무덤조차 크레타 섬 헤라클레이온의 성 밖으로 추방되어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홀로 묻힌 그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에 두려움이 있을 수 없고, 교회로부터 비록 파문당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마침내 자유 자체가 된 인물입니다. 건축가 승효상은 용기가 없어 아직 그럴 수 없는, 우리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아직은 추방할 수 없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가 순례한 무덤과 수도원에서 찾은 자유와 평화를 그 책을 통하여 선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모든 사람이 알기를 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2). 요한의 증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견고히 머물러 있으면 있을수록, 말씀에 붙잡혀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역설이지요. 그러나 맘몬에 매달려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커지는 것은 부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는 오직 믿음에서 옵니다. 이해되어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이해되는 것이 모순과 역설, 절망과 기적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범사감사의 신앙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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