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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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이사야서 43:16-21/ 빌립보서 3:4b-14/ 요한복음서 12:1-8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4-07 |
전주 | 오 거룩하신 주님(J. S. Bach) |
찬양1부 | 성자의 귀한 몸(Noble Cain)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사순절 찬송(Z. Reissner)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arr. J. C. Pardini) |
후주2부 | 주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arr. J. C. Pardini) |
성경본문 |
이사야서 43:16-21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 내가 병거와 말과 병력과 용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쓰러뜨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마치 꺼져 가는 등잔 심지같이 꺼버렸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들짐승들도 나를 공경할 것이다. 이리와 타조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내가 택한 내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빌립보서 3:4b-14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
1.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라고 하는 시기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 함락부터,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패망하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유대인 귀환 명령을 내린 주전 538년까지, 48년 동안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제2이사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의 저자인 제2이사야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예언자 제2이사야의 소명은 무엇보다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온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희망은 제2의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제2이사야는 먼저 이집트 노예생활에서부터 자기 백성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회상합니다: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 내가 병거와 말과 병력과 용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쓰러뜨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마치 꺼져가는 등잔 심지같이 꺼버렸다.’(사 43,16-17).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추적해오고, 앞은 홍해로 가로 막혔을 때, 홍해를 갈라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뒤쫓던 이집트 병사들을 쓰러뜨려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던 첫 번째 출애굽에 대한 기억을 불러낸 제2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제2의 출애굽’, 곧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들짐승들도 나를 공경할 것이다. 이리와 타조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내가 택한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었기 때문이다.’(사 43,19-20).
‘제2의 출애굽’은 단지 포로된 유대 백성의 해방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들짐승들도, 이리와 타조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제2의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새 일’은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포함하는 새로운 창조, 제2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유다 민족의 정치적 해방을 넘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라는 우주적 해방으로 확대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유다 민족의 야훼만이 아니라, 세계사의 주님이시요 새로운 창조주로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은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고, 옛 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2이사야 예언자는 선포합니다(사 43,18).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제2이사야 예언자의 이전의 선포와 충돌되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제2이사야는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전해 받은 전승들을 끝까지 고수하고, 하나님이 과거에 행한 위대한 행위들을 기억하라고 틈 있을 때마다 힘주어 역설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건망증을 규탄하고, 역사에 대한 기억이 구원을 촉진한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사 44,21;46,8-9).
그런데 바로 그 같은 예언자가 유다 백성에게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사 43,18)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일까요?
‘제2이사야’는 옛 전승과 전통이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으니, 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전통이 다 좋은 것이 아닌 것만큼, 모든 전통이 다 버려야 할 만큼 나쁜 것도 아닙니다. 버려야 할 전통이 있다면, 지키고 가꾸어야 할 전통도 있는 법이지요. 그러므로 제2이사야 예언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뒤를 돌아보면서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새 일’에 마음을 열고,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은 하나님이 하신 ‘옛 일’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2의 출애굽’은 ‘첫 번째 출애굽’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길’을 내는 일입니다. 첫 번째 출애굽에서는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내신 하나님께서(사 43,16), 이제 두 번째 출애굽에서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사 43,19).
옛 일과 새 일, 옛 출애굽과 새 출애굽, 같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 백성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이지요. 해방의 길을 내는 것은 같으나, 구원의 결과는 다릅니다. 옛 출애굽이 바다를 가르는 길을 내는 것이었다면, 새 출애굽은 사막에 강을 내는 길입니다. 광야와 사막에 사람만이 아니라, 들짐승들도 함께 살 수 있는 강, 생명의 근원인 물을 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시는 새 길은 이제 유다 민족의 해방이라는 좁은 의미의 정치적 구원을 넘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라는 우주적 구원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좁은 의미의 민족해방을 넘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해방의 우주적 지평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옛 일만 생각하면서, 과거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미래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새 일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시는 새 일을 위하여 언제나 필요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심으로써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새 일을 맡기십니다(사 43,25). 흥미로운 것은 용서로 번역되는 ‘forgiveness’가 ‘문밖’이라는 뜻의 ‘for’와 ‘가지다’는 뜻의 ‘ghabh’가 결합된 단어로써, ‘문밖에 두다,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속죄(贖罪)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파라’(kappara)는 ‘덮는다’ 혹은 ‘숨긴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용서는 죄를 덮어주고 숨겨주며 기억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제2이사야 예언자도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 죄를 기억하지 않는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사 43,25).
2.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심으로써 그를 하나님의 새 일을 위한 위대한 인물로 만드신 이가 있는데,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과거에 비추어보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도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열성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했던 인물입니다(빌 3,5-6).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아픈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사랑만이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많이 사랑한 사람이 많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눅 7,47).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부은 마리아도 그런 사람이지요. 사랑이 용서를 가능하게 했고, 용서에 대한 사랑의 응답은 거룩한 낭비로 표현된 것입니다(요 12,1-8).
하나님은 바울의 죄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복음을 위한 새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맡기신 새 일을 하면서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는 모든 것,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만들어준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기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빌 3,13-14).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한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은 ‘동일성’이라는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그의 과거와 현재의 총체입니다. 한 교회나 한 민족공동체의 정체성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참모습’이라는 의미에서의 정체성은 과거와 현재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참모습, 한 공동체의 참모습은 나의 몸과 기억에 남은 또는 역사에 남은 무늬가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시간과 함께 변하지 않는 정체성이라는 것도 없지만, 한 개인 혹은 한 공동체의 정체성은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그들이 꾸는 꿈, 희망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잊고자 한 ‘뒤에 있는 것’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모든 과거입니다. 거기에는 오래 기억하고 싶은 자랑스런 기억만이 아니라, 잊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자신을 교만에 빠뜨릴 수 있는 자랑스런 기억은 물론, 자신의 발목을 잡는 부끄러운 기억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미래에서부터 오시는, 미래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새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개인적이든지, 집단적이든지, 누구든지, 어느 교회나 민족이든지, 기억하고 전승해야 할 것과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잊어야할 것을 잊지 않아 소영웅주의에 빠지거나, 버려도 될 것을 버리지 않아 소시민주의에 빠지는 것,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 잊어 역사건망증에 빠지거나, 잊어도 될 것을 잊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쉽게 들끓는 냄비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하나님은 새 시대에는 새 시대에 맞는 새 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새 일을 깨닫고 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지나간 일은 기억하지 말고, 옛 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빌 3,14).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목표’,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빌 3,10-11).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으로 부활하는 삶, 우리의 비천한 몸이 만물을 복종시키시는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빌 3,21),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덧입게 될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체성은 우리가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과 옛일에 대한 생각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위로부터 부르신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갈 때 만들어질 것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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