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넷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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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니
성경구절 열왕기하 5:1-14/ 갈라디아서 6:7-16/ 누가복음서 10:17-2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7-07
전주 신실하신 주여 우리를 붙드소서(D. Buxtehude)
찬양1부 주 찬양해 오 내 영혼(Mikail M. Ippolitof-Ivanof)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 음성 외에는(Robert Lowry)
지휘자 김경원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arr. D. Bish)
후주2부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하나님(C. J. B. Meacham)
성경본문 열왕기하 5:1-14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시리아가 군대를 일으켜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 때에, 그 곳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잡아 온 적이 있었다.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소녀가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시리아 왕에게 나아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온 한 소녀가 한 말을 보고하였다. 시리아 왕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 보내겠으니, 가 보도록 하시오." 나아만은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옷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왕의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읽고 낙담하여, 자기의 옷을 찢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 이스라엘 왕이 낙담하여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습니다."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에게,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 나라의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하고 불평하였다. 그렇게 불평을 하고 나서, 나아만은 발길을 돌이켜, 분을 참지 못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부하들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말하였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이 시킨 대로, 요단 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다.

갈라디아서 6:7-16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누가복음서 10:17-20
일흔[두] 사람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북왕국 이스라엘과 다마스커스 사이에 일정한 긴장이 흐르면서도 아직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던, 주전 8세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시리아 왕이 매우 아끼는 큰 인물이었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나아만 장군이 포로로 잡아온 이스라엘 소녀를 통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가 자신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시리아 왕의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로 치유 여행을 가는 나아만 장군은 시리아 왕의 친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 줄 큰 선물을(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옷 열 벌) 가지고 갔습니다. 비록 적군의 장군이지만 이스라엘 왕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자기를 치유해 줄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 줄 큰 선물을 준비한 것으로 미루어 나아만 장군은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마침내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화려한 모습으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의 기대와 달리 엘리사는 직접 나와 자신을 정중히 맞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맨발로 뛰어 나와 예를 갖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리라고. 그러나 엘리사는 나오지도 않은 채, 단지 사환을 시켜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전한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나아만 장군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다고 합니다. 불쾌하고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리아 왕의 친서를 가지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온 자기를 대하는 엘리사의 태도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엘리사의 오만한 태도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치유법이라는 것이 너무 간단한 것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나라의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불평하면서 분을 참지 못해 발길을 돌이킨 것이지요.

 

그러자 부하들이 말립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밑져야 본전’, 먼 길을 왔는데 한번 속는 셈치고 해보자는 생각이었을까요? 아니면 진정으로 믿었을까요?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시킨 대로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다는 것입니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의 치유 이야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가 행한 수많은 기적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로서, 엘리사의 예언자적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전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나아만 장군의 변화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구원의 과정이 그가 걸린 나병만큼이나 어렵고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처방은 지극히, 아니 너무 단순해서 믿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믿음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대부분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한 순종의 행위에서 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엘리사의 단순한 제안에 순종하여 치유 받은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앞에 서서 고백합니다: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님의 종인 저는, 이제부터 주님 이외에 다른 신들에게는 번제나 희생제를 드리지 않겠습니다.’(왕하 5,15-17).

 

순종이 치유와 믿음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나아만 장군은 자존심과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엘리사의 지극히 단순한 말에 순종함으로써, 치유와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순종이라는 씨앗을 심어 믿음이라는 열매를 거둔 것이지요.

 

 

2.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6,7).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있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자기를 속이면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6,7). ‘자기를 속이면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무 것도 아니면서 자신이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6,3).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면서, 정작 자기 스스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육체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만, 십자가는 자랑하지 않는 사람들(6,12-14)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격언은 그리스 철학의 비방문학과 플라톤의 저서에서도 발견됩니다.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 55년경-135년경)만일 네가 누군가에 대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너 자신을 불신하는 것이 된다.’ ‘네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바보 중에서도 바보!’라는 말을 남겼지요.

 

사도 바울이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그리스의 철학과 윤리적 교설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문제 삼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기는 위험성입니다.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거나,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스스로의 생각이거나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바울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또 다른 경고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6,4). 진정한 자아성찰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행동을 전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남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구,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나무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보여줌이 자신에게는 유리한 비교, 자신과 비교되는 사람에게는 불리한 비교라면, 다시 말해 부풀리기와 거짓으로 자신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사필귀정’(事必歸正)같이 비슷한 의미의 표현이 있지요. 처음에는 시비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바르게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우리의 경험을 살펴봐도 사람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둡니다. 마치 오랜 세월 축적된 습관과 자세가 우리 얼굴과 몸의 형태로 나타나듯이, 우리가 남을 어떻게 대하면서 살아 왔는지, 우리가 살면서 뿌린 씨대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요? 평생 선하게 살면서 악을 행하거나 남의 가슴에 못을 박은 일도 없는 사람이 다 행복한 것도 아니지만, 악을 행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스럽게 사는 사람이 더 잘나가기도 하는 것이 세상이 아닐까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심고 거둠의 비유를 우리들의 생활 경험의 빛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음과 같이 위로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6,9).

 

중요한 것은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고 지쳐서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이 우리를 속이고, 경험이 우리를 배반한다고 해도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인생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 선한 일을 하다가 오해를 받거나, 방해를 받거나, 박해를 받으면 중도에 포기합니다. ‘세상은 본래 그래...’, 아니면,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세상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탓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우리가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오실 때,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3. 누가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 일흔 두 사람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했다고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세를 힘입어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르면서, 귀신들을 굴복시켰으니, 제자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들은 자신이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10, 20)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선교적 과제였습니다(10, 9). 병이 귀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이해가 퍼져있던 당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곧 치유의 행위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었으니 사람들도 놀랐겠지만, 스스로도 놀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우쭐대며 보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령이 제자들에게 복종한 것이, 그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등록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뜻이지요. 성서학자들은 이 말씀을 영적 교만에 대한 경고나 개인적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 곧 종교적 율법을 강요하면서 다른 계율들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6,14). 자기가 무엇이나 된 것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영적 교만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6,15)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태 신앙이라고, 교회 오래 다녔다고,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5,6).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것’(5,13),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는 것’(6,2), ‘자기 육체에다 심어 썩을 것을 거두지 않고, 성령에 심어 영생을 거두는 사람’(6,8)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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