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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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
성경구절 이사야서 50:4-9a/ 빌립보서 2:5-11/ 누가복음서 23:13-25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4-14
전주 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J. S. Bach)
찬양1부 호산나(Jules Granier)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종려주일 찬송(S. E. Rogers)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호산나 주를 찬송하리로다(M. Teschner)
후주2부 호산나 주를 찬송하리로다(Th. Dubois)
성경본문 이사야서 50:4-9a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빌립보서 2:5-11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서 23:13-25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모아 놓고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 사람이 백성을 오도한다고 하여 내게로 끌고 왔으나, 보다시피, 내가 그대들 앞에서 친히 신문하여 보았지만, 그대들이 고발한 것과 같은 죄목은 아무것도 이 사람에게서 찾지 못하였소. 헤롯도 또한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를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이오.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하고, 놓아주겠소." 그러나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말하였다. "이 자를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시오." - 바라바는, 그 성 안에서 일어난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외쳤다. "그 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가 세 번째 그들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나는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까 하오." 그러나 그들은 마구 우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의 뜻대로 하게 넘겨주었다.

1. 이사야서 50장은 제2이사야 예언자의 세 번째 하나님의 종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2이사야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부르셨고,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그 이름을 기억하신’(49,1) ‘하나님의 종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른바 모태신앙혹은 예정론의 반영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예언자에게 부여된 사명을 확인하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신하는 표현이지요.

 

예언자에게 주어진 사명, 하나님께서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를 주님의 종으로 삼으신 것은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으시려는것입니다(49,5). 그러나 포로로 잡혀가고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불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제2이사야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 같았습니다. 예언자는 쓸모없고 허무한 일에 힘을 허비한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49,4). 자기 백성에게 절망한 예언자,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그의 귀를 열어주시어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하시고, 제자의 혀를 주어 말로 대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50,5).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말하는 것에 의해 자기 존재가 규정되는 사람입니다. 새번역은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주 야훼가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셨다... 그는 내 귀를 일깨워 제자처럼 듣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학자처럼 유식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대로 말하는 제자와 같습니다. 그가 듣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말해야 할 것을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듣기 원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과 비난과 모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에게 절망하면서도, 예언자가 감당하기 아려운 임무에 반항하지 않고,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고, 침을 뱉고 모욕하여도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셨기 때문입니다(50,6).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는 어떤 모욕에도 마음 상하지 않을 수 있었고,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50,7).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살아오면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고, 모멸감에 몸이 떨리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 모함에 빠졌을 때의 억울함에서 오는 분노, ‘- 하더라’, ‘아니면 말고식의 뒷담화로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의 불쾌감을 여러분은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사적인 욕망충족이 아니라 대의와 공의를 위해 일하다가 오해를 받고, 모독을 당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자신을 다스립니까?

 

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고, 사람마다 서로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오해는 자유이고, 나는 오해를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언젠가 진실은 드러난다고 생각하고 그저 무시해버리는 길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 종교들이 가르치는 훈련방법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호흡법, 명상, 기도 등이 그것이지요. 아니면 모함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기,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원수 갚기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니,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12,19) 신앙도 하나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제2이사야 예언자는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비난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2이사야 예언자는 네 번째 하나님의 종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53,1-12).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멸시와 굴욕을 당하고, 심지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보여준 하나님의 종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왜 침묵했을까요? 대꾸하거나 변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도 기가 막혀서? 아니면 고통에 지쳐 말할 힘조차 없어서? 아니면 침묵은 최고 권력자에 대한 가장 힘없는 자가 취할 수 있는 경멸의 표현이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하나님의 종이 모욕에도 마음을 상하지 않고, 말없이 어려움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믿음 때문임을 증언합니다(50,8).

 

2. 복음서 기자들은 제2이사야가 노래한 하나님의 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원형(Urbild)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보다 앞서 같은 길을 가신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본 것이지요.

 

2이사야의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처럼, 헤롯 안티파스 왕의 신문(訊問)을 받은 예수님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23,9).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곁에서 예수님을 맹렬하게 고발하고, 헤롯이 자기 호위병들과 함께 자신을 모욕하고 조롱할 때에도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로마 제국이 유대 지방에 파견한 행정관(Procuratore) 빌라도(Pontius Pilate)에게 돌려보내진 예수님, 그의 신문에도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빌라도가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라고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단 한 가지 고발에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은 매우 이상히 여겼다’(27,14)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침묵하신 것일까요? 대제사장들의 근거 없는 고발에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었을까요? 헤롯의 조롱과 모독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채찍 고문으로 신문 전에 이미 온 몸이 무너져 내려 말할 힘도 없었기 때문일까요?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후 유대인의 왕만세를 외치는 로마 병사들에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수모(受侮)를 당했기 때문일까요? 로마 제국의 법을 정의롭게 집행해야 할 빌라도의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경멸스러웠기 때문일까요? 대중의 소요가 일어나면, 총독으로서의 자기 평판이 나빠질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법을 지켜야 할 총독이 스스로 로마의 사법정의를 파기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요? ‘사실을 다루고 판단해야 할 재판관인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답변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비아냥거리는 것임을 느끼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한 과정임을 수용하고 순종했기 때문일까요?

 

성경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지 예수님이 말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고 합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력자에게 힘없는 사람이 흔히 취할 수 있는 선택인 비겁한 굴종이나 타협, 또는 항변, 혹은 경멸(輕蔑/깔보아 업신여김), 또는 연민(憐憫/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의 정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이상히 여길 정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15,5).

 

사도 바울도 이런 예수님의 침묵에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2,6-8).

 

하나님의 자기 낮춤은 아들의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아들은 절규하는데, 이제는 아버지께서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의 절규는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대해 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던 존재의 침묵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는 한 번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기도로 수난 내러티브를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이 흔하게 사용한 하나님 호칭입니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는 것처럼 버림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 이상 전능자에게 감히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일반적인 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지요. 절망의 가장 밑바닥에는 배신과 모욕, 십자가형의 고통보다 더한 하나님의 침묵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침묵,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아직 예견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빌라도의 조금은 호의적으로 보이는 태도에 희망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 전승에 따르면,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고발한 것과 같은 죄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매질 정도를 한 후에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합니다(23,14-16). 그러나 대중들의 마구 우기는 큰 소리를 못 이겨 결국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형에 넘겨줍니다(23,23-24). 누가는 그들이 마구 우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였고, 마침내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고 합니다(23,23).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그들에 의해 선동된 군중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마구 우기는 외침에결국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굴복한 것이지요.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23,23). 매수되고 선동된 군중의 마구 우기는 큰 소리에 의해 죄 없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역사상 어찌 예수님뿐이겠습니까? 집단적 차별과 수많은 집단 학살, 심지어 얼마나 많은 전쟁들이 조장된 편견과 조작된 사건, 사이비 이념과 가짜 뉴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왜곡되었습니까! 반유대주의와 유럽 중세의 마녀사냥에서부터, 십자군 전쟁, 식민주의와 노예제도와 인종주의, 나치의 유대인과 집시 학살, 통킹만 자작 사건으로 일어난 베트남 전쟁, 있지도 않은 대량학살 무기를 구실로 시작된 이라크 침공, 1948년의 4,3 제주양민학살사건도 그렇습니다.

 

물론 선동되고 동원된 모든 집단적 행동이 부정적인 면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왜곡, 집단적 폭력, 정신적, 육체적 테러, 사회분열, 나아가 전쟁이 부정적 측면이라면, 소통과 사회변혁의 힘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요. 그러나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가짜 뉴스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극단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집단의 폭력은 참으로 무서운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왕따악플도 사람을 파괴합니다. 정치인들의 막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현실은 이런 막말이 힘을 얻고, 마구 큰 소리로 우기는 사람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진실보다 가짜 뉴스가 더 빠르게 확산됩니다. ‘팩트 첵크도 믿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이 점에서는 배운 사람이건 안 배운 사람이건 마찬가지 같습니다. ‘내로남불’, ‘내가 하는 것은 다 옳고 입장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모두 틀리다는 뻔뻔스런 주장이 마지막 승자처럼 보입니다. 생각과 입장이 다른 타자에 대한 반응은 한결같이 극단으로만 치닫습니다. 이성과 양심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마구 우기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세상의 질서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이 헤롯 안티파스와 빌라도의 법정에서 침묵하신 것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들에 의해 매수되고 선동된 대중의 우기는 외침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꾸할 답변과 논리가 궁색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더 이상 사법정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침묵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드리신 것, 그것은 아버지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고뇌에 차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서 땅에 떨어질 정도로 기도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고 골고다로 향했습니다(22,42). 예수님을 침묵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십자가가 피할 수 없는 길인지, 왜 그 길을 가야하는지, 그 길 아니고서는 다른 길은 없는지,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에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모태에서부터 부르셨고,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주신 하나님, 세례 받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1,11)고 말씀하신 주님,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실 때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끝 모를 심연으로 한 없이 가라앉는 절망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이겼습니다. 마구 우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로 외친 군중이 이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들의 뜻대로 하게 넘겨주었습니다(23,25).

 

그러나 하나님은 사흘 만에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큰 돌로 무덤을 봉인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친 후, 부활했다고 가짜 뉴스를 만들어낼 것이라며 경비병을 두어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했으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이지요(27,66).

 

십자가에서는 그들의 우기는 소리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권력자와 그들에 의해 선동되고 동원된 대중이 잠시 이길 수는 있어도, 최후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신다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고전 15,24). 악이 잠시 이길 수는 있어도 영원히 이기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구 우기면서 소리치는 사람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질서와 쉽게 변하는 인간성에 절망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기 백성에게 절망한 모든 예언자가 이 세상을 향하여 아니!’(Nein!)라고 말할 수 있는 힘과 소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의 우기는 큰소리가 선을 침묵시킨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결코 소진되지 않는 믿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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