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열번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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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성경구절 하박국서 2:1-4/ 데살로니가후서 1:11-12/ 누가복음서 19:1-1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11-03
전주 주를 높이나이다(D. Zipoli)
찬양1부 내 영혼의 구주(Edward W. Norman)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거룩한 주님(Franz Abt)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주는 우리의 반석이시다(W. B. Bradbury)
후주2부 주는 우리의 반석이시다(W. B. Bradbury)
성경본문 하박국서 2:1-4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기다려 보겠다.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데살로니가후서 1:11-12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19:1-10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1. 데살로니가 교회는 온갖 박해와 환난을 인내와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서로 사랑을 풍성히 베푸는 일로 사도 바울의 자랑이 된 초대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신앙인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기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들의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사도 바울이 보냈다는 가짜 편지들을 내세우면서, 주님의 재림이 벌써 왔다고, 다시 말해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불법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속이는 사기꾼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사람들을 현혹하고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른바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시대의 위기를 종말의 표징으로 해석하면서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협박하여 사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특징은 무질서(살전 5,14)와 무절제(살후 3,6)입니다. 이들은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살후 3,11).

직분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들, 이른바 노이지 마케팅가짜 뉴스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사익을 챙기면서 진리를 어둡게 하는 대표적인 집단은 모두는 아닐지 몰라도 - 정치인들일 것입니다. 이들의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오히려 우리가 창피해서 누구 탓하기도 어렵습니다. 한 나라의 정치인들의 수준은 그들을 뽑아준 사람들의 수준, 평균적 국민수준과 같으니까요. 그래서 동화 톰 소여의 모험으로 알려진 미국 소설가이자 사회비평가였던,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정치인과 기저귀는 자주 갈아주어야 한다. 그 이유는 똑 같다’(Politicians and diapers must be changed often, and for the same reason)고 말한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은 가짜 뉴스가 아니라, ‘진리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고(살후 2,13), 성실하게 노동을 하면서 생활하고,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살후 3,13).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이유는 신()처럼 되라는데 있지 않습니다. 현실과 일상을 거부하는 초월적인 삶을 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일상생활을 해치는 신앙생활은 진정한 생활신앙이 아닙니다.

 

 

2. 예언자 하박국에 의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무슨 믿음일까요? 이 세상이 분명히 끝난다는 믿음입니다(2, 3). 예언자 하박국은 주전 605년과 597년 사이에 유다를 통치한 여호야김 시대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법과 질서를 세우고 정의를 실천해야 할 왕이 강대국인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하여 폭력으로 자기 백성을 착취하던 시기였습니다. 백성은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폭력이다!’하고 외쳐도 누구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1,2). 약탈과 폭력,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해이하고 공의는 시행되지 못하고, 악인은 의인을 협박하고, 공의가 왜곡된 세상이 되었습니다(1,3-4).

바벨론 제국의 군대는 폭풍처럼 밀려오고, 숨어 있는 가엾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니, 유다 백성의 입술은 떨리고, 뼈는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합니다(3,14-16).

 

온 세상이 끝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죽음으로, 국가적으로는 멸망으로 경험되는 세상의 끝이 모든 사람을 성숙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거만하고, 탐욕을 채우느라고 쉴 날이 없었습니다.’(2,5). 그런 사람들에게 세상의 끝은 곧 심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끝을 새로운 시작, ‘바다에 물이 가득하듯이, 주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땅 위에 가득한 새로운 세상’(2,14)의 시작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끝은 심판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은 세상의 끝을 심판이 아니라, 은혜의 때로 믿는 사람입니다. 개인적 죽음이건, 한 나라의 멸망이든 그것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3. 키가 작은 세관장, 아라비아 반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여리고에서, 베뢰아를 통해서 유다로 들어오는 상품에 대하여 통관세를 받아 로마 제국에 바치는 세금 징수원들의 우두머리로 부유했지만, 백성의 원망과 경멸을 온 몸에 받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자카이’(Zakkai)의 헬라식 형태인데, ‘순수한’, 혹은 의로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세리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의 전형적인 유대적 이름인 것으로 미루어, 그에게 그런 이름을 준 그의 부모는 물론, 그 자신도 백성의 경멸을 받는 세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세리들의 우두머리로 부유했다면, 그가 결코 순수하고 의롭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무슨 운명이 그를 식민지 시대의 세리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키가 작다는 누가의 보도에서, 우리는 그런 이유로 그가 어려서부터 차별받고 소외당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왜 예수님을 보려고 그렇게 애썼는지 누가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7,34)로 불리는지 알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달려갔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님을 볼 수 없자, 삭개오는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나무 위로 올라 간 것은 예수님을 더 잘 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무 잎과 가지로 자신을 가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적대하고 경멸하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한편으로는 수치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먼저 쳐다보시면서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19,5). 놀란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셔 들였습니다.’(19,6).

 

그러자 이 광경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19,7). 죄인 집에 들어가는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따가운 시선과 수군거림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기쁨에 넘친 삭개오,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19,8).

 

어떤 주석학자는 삭개오 이야기가 앞서 누가복음 1818절부터 26절까지에 나오는 부자 관리에 대한 이야기와 대조되는 것을 이해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지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18,22)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관리와 달리,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결단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부자 관리가 재물 사용과 관련된 부정적 모델이라면, 부자 삭개오는 재물 사용과 관련된 긍정적인 모델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은 마치 선행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선행은 믿음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입니다. 선행을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선행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착한 일을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착한 일을 합니다.

 

선행은 구원받기 위한 의무가 아닙니다. 삭개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유의 절반을 주겠다고 말한 것은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을 훨씬 넘어서는 행동이었습니다. 구제의 경우, 당시 수입의 오분의 일(20퍼센트)이면 충분한 것이었고, 직무상 부당취득에 대한 보상의 경우도 오분의 일(20퍼센트)을 덧붙여 주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6,5; 5,6-7). 그런데 삭개오는 내가 누구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삭개오가 강제로 빼앗은 경우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당시 율법이 규정한, 율법이 요구하는 배상기준과 의무를 훨씬 능가하는 선행을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9-10)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세리로서 유대 백성의 증오와 경멸을 받는 죄인이지만,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에게는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4.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던 분,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7,34)라고 불렀던 예수님은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 같은 분이시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는 예수님처럼,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아니 교회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교회마저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은 교회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의 이름으로 추방하고 박해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교가 국가종교가 된 이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유대인이라고, 이단이라고, 마녀라고, 집시라고, 종교개혁자들이라고, 재세례파라고, 원주민이라고, 피부색이 검다고, 미개한 식민지 백성이라고 추방하고 박해했습니다. 지금도 성 소수자들, 난민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 이른바 좌파 혹은 빨갱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로부터 추방되는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힘 가진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고, 힘쓰는 사람들은 잘 찾지도 않는 사람들, 중고등학교 중퇴학생들, 대학 못간 청년들, 실업자들, 장애인들, 병으로 고통 받는 노인들, 탈북자들도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선교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19,10)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아니, 찾아 나서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오는 사람 막지는 않는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진보와 보수,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불신앙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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