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첫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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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악마
성경구절 신명기 26:1-11/ 로마서 10:8-13/ 누가복음서 4:1-13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3-10
전주 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J. S. Bach)
찬양1부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John Stainer)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John Stainer)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M. Moody)
후주2부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M. Moody)
성경본문 신명기 26:1-11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시는 그 땅에 당신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고 살 때에,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에서 거둔 모든 농산물의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십시오. 거기에서 당신들은 직무를 맡고 있는 제사장에게 가서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제사장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오늘 아룁니다' 하고 보고를 하십시오. 제사장이 당신들의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제단 앞에 놓으면,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십시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것을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 놓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레위 사람과, 당신들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십시오.

로마서 10:8-13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4:1-13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그래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1.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악마의 시험을 받으신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 모두에 전승되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사탄에게 시험(試驗)을 받으셨다고 보도합니다(막 1,12-13).

이른바 ‘Q자료’, 곧 예수님의 ‘어록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다는 마태와 누가는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의 내용, 곧 세 가지 유혹의 성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돌들을 빵으로 만들라는 시험’,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 ‘악마에게 엎드려서 절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이 그것이지요.

 

마태와 누가는 악마의 세 가지 시험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시험의 순서를 바꾼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을 두 번째 시험에 두는데 반해, 누가는 마지막 세 번째 시험에 배치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의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서 당할 시험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복음서 모두 공히 예수님의 시험이 성령과 관계된 것으로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악마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성령에 이끌려’(마 4,1; 눅 4,1), 시험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가는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즉 ‘광야로 몰아내셨다’(막 1,12)고 합니다. ‘광야’는 물론 여기서 지리적으로 유대 광야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광야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출애굽기 3,18; 출애굽기 7,16; 민수기 3,14; 호세아서 2,14-15 등)이기도 하지만, 야생동물들과 귀신들의 거처를 의미했습니다(레위기 16,10; 이사야서 13,21; 34,14 등). 광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인간의 삶과 같습니다.

 

이런 광야로 예수님은 가고 싶어서 스스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누구든지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거칠고 황량한 광야 한 복판으로 몰아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악마가 우리를 시험할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에 이끌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인도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악마의 시험을 받지 않을 때는 물론이지만, 악마의 시험을 받을 때는 더욱 성령 안에서 인도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악마의 시험을 받는 것을 결코 낯설어 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마는 세 가지 유혹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기적을 통해 입증해보라는 것이지요. 게다가 40일을 굶주린 예수님에게 배고픔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지 못할 바 없겠으나, 하나님의 아들 됨이 오직 기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믿음은 기적을 배제하지 않지만, 오직 기적으로만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40일 동안의 굶주림과 고통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한 이스라엘 백성을 암시합니다. 이집트 땅에서 배불리 먹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면서(출 16,3),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출 16,2), 하나님에게 대들면서 하나님을 시험한(출 17,7)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시고(출 16,13-15),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셨습니다(출 15,25).

그러나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을 신명기의 말씀(8장 3절)으로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 8,3).

이 말씀은 먹고 사는 문제, 물질세계의 현실을 무시하는 도덕군자나 신선 같은 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목수로서 노동을 해야 했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섰을 때는 제자들과 함께 방랑하면서 ‘매일의 양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절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고픔은 절제될 수 없고, 지속되면 사람의 목숨을 해칩니다. 그러므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빵이냐 자유냐’, ‘육체냐 영혼이냐’라는 이분법적 양자택일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시험 이야기가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이 반영된 것이라면, 이 시험은 경제성장의 신화를 실현할 ‘경제권력’에 대한 유혹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런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눅 4,6).

 

‘경제권력’만으로는 예수님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그랬을까요? 악마는 예수님에게 이 세상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 곧 절대의 ‘정치권력’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악마의 말, ‘권세와 영광은 나에게 넘어 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눅 4,6)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이 악마의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 모든 나라는 국민의 것도, 통치자의 것도 아니라 악마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정치권력을 악마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영국 정치인, 존 달버그 액턴 John Dalberg-Acton, 1834-1902)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악마의 주장과는 다른 주장을 하십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마 6,1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악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령 악마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지라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악마의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악마에게 엎드려 절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가지고 싶을 만큼 유혹적입니다. 진시황이 찾아 나선 ‘불로초’보다,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걸고 거래했던 파우스트 박사의 ‘젊음’도, 이 세상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만큼 유혹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마 4,10)는 성경말씀으로 악마의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마 6,13)이라고.

 

‘주님의 기도’는 곤혹스러울만큼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께 것입니다’라고 기도하고 선언할 때,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 악마는 얼마나 놀라고 긴장하겠습니까! 어찌 악마뿐이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나라의 권세자들도 긴장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악마의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만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소유한 악마나 권세자들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게 합니다. 세상이 유혹하는 헛된 영광에 ‘아니오!’를 말할 수 있게 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것임을 증거했기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우리같이 평범하고 믿음이 약한 신앙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지키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눅 6,9-11).

 

흥미로운 것은 악마가 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반박하신 예수님에 대한 반박을 성경말씀으로 한 것이지요: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시편 91편 1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앞서 있었던 두 번의 시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정복당한 악마는 이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악마는 충분히 간교합니다. 악마의 사악함은 악을 감추고 선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악마는 천사의 얼굴로 다가온다는 말도 있지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과 다툼과 분열도 성경을 근거로, 성경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성경말씀만 당파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다른 해석을 정죄하는 것은 사악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악마의 사악함을 깨는 것도 오직 말씀 뿐, 예수님은 다시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종교권력의 가장 치명적인 유혹입니다. 진정한 종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는 것이지,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강변하고,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교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했으나, 결국 이기지 못한 악마는 마침내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아주 떠나지는 않습니다. 누가에 의하면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눅 4,13)고 합니다.

 

악마의 유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악마는 잠시 물러가 떠나 있을 수는 있어도 언제든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누가복음에서 악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눅 22,3-4),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인지 논의를 시작할 때, 다시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악마의 시험을 이겼다고 해서 다시 시험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파도와 같아서 한번 지나갔어도 또 다시 밀려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매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시험했던 악마,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시험하는 이 악마는 누구일까요?

 

2. 누가는 사탄(Satan)이라는 이름을 피하지 않지만(10,18; 11,18; 13,16; 22,3 등),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 이야기에서는 일관되게 ‘악마’(디아볼로스/diabolos)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탄’은 ‘적대자, 비난하는 자, 고발하는 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사탄은 하늘 궁정에 있습니다(욥 2,1; 슥 3,1-2). ‘사탄’은 원래 ‘적대자, 비난하는 자, 고발하는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때는 인간이고, 어떤 때는 천상의 존재입니다. 욥기에서 사탄은 신이 주재하는 위원회의 멤버입니다. 사탄은 하나의 직책, 다시 말해 감독자 또는 형 집행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지 누구의 이름이 아닙니다. 욥기에 의하면 사탄은 천사들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고 묻자, 사탄은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해학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욥기를 제외한 구약성경에서는 ‘사탄’을 거의 찾을 수 없고, 있더라도 중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초기에 누가와 마태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적대자라는 뜻의 악마를 ‘디아볼로스’(diabolos)라고 불렀는데, 이 헬라어 단어는 ‘비난하는 자’, 또는 ‘모함하는 자’를 의미하였습니다.

 

‘사탄’과 ‘악마’는 서로 달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기원전 300년쯤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게서 뜻밖의 해석법이 등장하여 히브리어의 ‘사탄’이 그리스어 ‘디아볼로스’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악마가 동일한 의미가 아니면서도 동일한 명칭을 갖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결과 라틴어의 ‘diabolus’에서 ‘devil’이라는 영어 단어의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신약성서에서도 단어들이 혼란스럽게 사용되었지만, 그 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악마의 이미지는 그렇게 연속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악마에 대한 회화나 조각, 도상 등에서 드러나는 표현 양식도 당시의 정치적, 신학적 논쟁이 반영되어 있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알려진 악마의 대중적 이미지는 수염이 나고 머리에 뿔이 달린데다가 꼬리가 있고, 손에는 풀 긁는 갈퀴가 들려 있는 모습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악마의 이미지는 기원전 2000년 이전의 옛 바빌로니아 뇌우신(雷雨神, 천둥과 비의 신)인 아다드(Adad)가 던지는 세 갈래 번개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헌상의 답은 없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악마가 중세 그림이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격화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세 악마의 도상을 연구한 루서 링크는 ‘악마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수많은 가면을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의 본질은 얼굴 없는 가면, 그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악마를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엡 2,2). 그렇습니다. 악마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력을 가지고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면, 인간은 아마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만들었을 거야.’

 

무섭고 두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마는 인간과 동떨어진 인간 밖에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려는 사악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세력에 사로잡힌 인간 자신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가룟 유다에게 악마가 들어가 예수님을 팔려고 계획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악마였던 것이지요. 앞길을 가로막는 제자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을 거스릴 때, 이미 그 사람이 악마라는 것이지요.

 

3. 그러나 오늘 우리의 관심은 악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규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은 악마에게서 어떤 시험을 받으셨는지, 그리고 그 시험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받을 수 있는 같은 시험을 그러면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 전에 악마로부터 세 가지 시험 혹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성장의 기적이라는 ‘경제권력’의 유혹, 모든 나라와 영광과 권세라는 ‘정치권력’의 유혹,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종교권력’의 유혹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니고서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자, 이길 수 없는 시험이지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이 세 말씀으로 예수님은 악마의 시험을 이기시고, 유혹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4.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주일 전 세족 목요일까지 40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회상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회와 회개, 금식과 금육으로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일종의 정화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노아의 홍수기간 40일(창세기 6,5-7,22),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 (신명기 8,2; 29,5),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머문 것(신명기 9,18), 예언자 엘리야가 밤낮으로 40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도착한 것(왕상 19,8),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40주야를 단식하신 것(마태 4,1-11), 예수님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지상에서 머무신 것(사도행전 1,3) 등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숫자의 의미는 참회와 정화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사순시기동안 우리가 하는 참회와 정화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받으셨던 세 가지 시험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이기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신 방식대로 하면 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신앙인에 의해서만 증거됩니다. ‘경제권력’에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성장에의 무한한 굶주림이 아니라, 금식, 곧 자발적 절제에 있습니다. ‘정치권력’에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 악마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악마의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고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기도에서부터 옵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종교권력’에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옵니다.

 

악마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던 성령, 악마의 시험 가운데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와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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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 2018-12-23 대림절 넷째주일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채수일 목사
947 2018-12-16 대림절 셋째주일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 채수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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