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일곱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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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하나님은 (어떻게) 보상하시는가?
성경구절 예레미야서 17:5-10/ 고린도전서 15:12-20/ 누가복음서 6:17-26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2-17
전주 주께 간구하나이다(J. S. Bach)
찬양1부 너 주의 사람아(Eric. H. Thiman)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께 감사하라(I. B. Wilson)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믿음 더욱 주소서(W. J. Kirkpatrick)
후주2부 너 주의 사람아(G. Young)
성경본문 예레미야서 17:5-10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

고린도전서 15:12-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누가복음서 6:17-26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1. 하나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을 따라 보상하시는가? 보상하신다면 무슨 보상을, 어떻게 하시는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화를 내리신다면, 그 복은 어떤 것이고 그 화는 무엇일까? 복과 화는 살아있을 때 주시는가, 아니면 죽음 후에 천당과 지옥으로 보내심으로써 보상하시는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많지만,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아니면 유치한 기복신앙 혹은 우상숭배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입장이나 경험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만큼,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신앙인보다 덜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선을 유신론에 일치시키고, 도덕적 악을 유물론에 일치시키는 낡은 사고방식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덜 진지하고, 덜 도덕적이라는 근거 없는 편견을 조장합니다. 신앙의 유무가 한 인간의 도덕성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보다 나쁜 일을 더 많이 저지른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의 보상 혹은 지옥에서의 형벌을 믿는 것이 사람을 더 착하게 만든다는 수많은 긍정적 효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있지요. 천국에서의 보상에 대한 믿음이 때때로 끔찍한 악행을 촉발할 수 있다는 증거도 많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 특히 자살폭탄테러 등이 그것입니다.

 

오직 보상에 대한 기대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아적 신 개념을 가진 신앙인의 성숙하지 않은 신앙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라틴 아메리카에 널리 퍼진 이른바 번영의 신학입니다.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동서독 통일 후, 브라질 상 파울로에서 학술모임이 있었습니다. 해방신학의 현장을 본다는 기대와 함께 찾아갔으나 브라질 민중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빈민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예배당들이 있었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설교자가 설교 중에 갑자기 ‘1달러라고 외치면서 헌금 접시를 돌렸습니다. 누군가 헌금을 하자, 그를 위해 기도를 하더니, 다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5달러라고 외치면서 접시를 돌리고, 다시 기도하고, 설교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헌금이 축복과 맞교환되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들 가난하고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브라질 민중의 절박함,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신성모독 행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번영신학이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신앙이 물질적 보상에 대한 기대에 근거하고, 축복이 돈으로 환산된다고 믿는 신앙 형태는 단지 브라질의 가난한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를 지배했던 이른바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도 비슷한 것이지요.

 

물론 성경이 말하는 복은 충분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입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당신들에게 찾아와서 당신들을 따를 것입니다. 당신들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태가 복을 받아 자식을 많이 낳고, 땅이 복을 받아 열매를 풍성하게 내고, 집짐승이 복을 받아 번식할 것이니, 소도 많아지고 양도 새끼를 많이 낳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곡식 광주리도 반죽 그릇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신명기 28,2-6).

 

그리고 하나님은 보상과 보복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악인에게 돌아오는 삯은 헛것이지만, 정의를 심는 사람은 참 보상을 받는다.’(잠언 11,18). ‘죄인에게는 재앙이 따르지만, 의인에게는 좋은 보상이 따른다.’(잠언 13,21).

 

나 주는 공평을 사랑하고, 불의와 약탈을 미워한다. 나는 그들의 수고를 성실히 보상하여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이사야서 61,8).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9,5).

 

주님께서는, 은혜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베풀어 주시지만, 조상의 죄는 반드시 자손이 치르게 하시는 분이시며,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만군의 주님으로 이름을 떨치시는 분이십니다.’(32,18)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실과 모든 행위대로 심판하시고(24,14), 설령 그 심판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반드시 그 자손이 죄 값을 치르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위선자들을 꾸짖으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더 놀랍습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태 23,33). 그러나 박해를 받는 제자들에게는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6,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경험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도 절규했던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헛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 이것을 보고,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전도서 8,14).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현실 경험이 지금도 그렇다고 해도, 착하고 의롭게 산다는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일일까요?

 

 

2. 유다 왕 요시야 제13, 주전 627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을 복과 저주의 선택 앞에 세웠습니다: ‘주님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17,5).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17,7).

 

주님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약속한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저주와 복이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주도 복도 유다 민족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저주와 복의 내용입니다.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저주는 그가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17,6). 그리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받는 복은 그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17,8)는 것입니다.

 

농경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화와 복이 메마른 사막과 물이 풍부하여 비옥한 농토의 대조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화와 복은 단지 개인, 유다의 왕에게만 선언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멸망해가는 자기 조국 유다를 보면서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에게 미칠 복과 저주는 폐허가 될 국토에 대한 예언과 다시 회복될 독립국가의 번영에 대한 집단적 약속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활동한 시기는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기 40년 전부터, 주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한 직후까지였습니다. 이 시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신흥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이 주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는 유다를 정복, 봉신군주 여호야김을 세우고 철수했습니다(왕하 23,34). 그러나 주전 605,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프라테스 강가의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를 대패시켰고(46,2), 유다 왕 여호야김은 다시 바벨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힘없는 나라, 이리저리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만 살피면서 이집트에 붙었다, 바벨론에 붙었다, 다시 배신하는 등, 국제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마침내 멸망한 나라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조국 유다였습니다. 배신한 유다를 응징하기 위해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 예루살렘 성 함락 후, 바벨론은 유다 왕 여호야긴과 지도층 인사들을 주전 597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웠습니다(왕하 24,17). 그러나 시드기야는 나라 안에 있던 반 바벨론 세력들의 후원을 받아 주변 이웃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다시 바벨론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주전 587년 유다 왕국은 멸망했고, 시드기야 왕은 눈을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5; 39, 52).

 

예언자 예레미야는 앗수르 제국이 무너지고, 바벨론 제국이 당시 중동 세계를 석권하기 직전부터 자기 나라 유다의 운명이 세계 역사를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층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사람을 의지하며, 이집트나 반 바벨론 세력들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었던 것이지요. 유다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지조 없이 행동했고, 결과는 앗시리아에게서 수치를 당했던 것처럼, 이집트에게서도 수치를 당했고’, 마침내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것이었습니다.(2,36).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주님.’(17,10)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심장을 감찰하며폐부를 시험하며라는 뜻입니다. 폐부는 콩팥들과 염통을 뜻합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염통과 마찬가지로 콩팥을 사람 몸에서 가장 깊숙하고도 비밀스런 곳이자, 사람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콩팥들과 염통을 살피시는 분이라고 하는 말은 시편 79절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도 억울하게 악인들에게 쫓기는 시인이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어, 뭇 백성들을 판단하시는 분이시고, 악한 자의 악행을 뿌리 뽑고, 의인은 굳세게 세워 주시는 분,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런 분이실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보상하실까요? 하나님은 악한 자의 악행을 뿌리 뽑고, 의인은 굳세게 세워주심으로써 보상하신다는 것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믿음입니다.

 

 

3. 누가복음에 전승되고 있는 예수님의 이른바 평지설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마태의 산상설교(5,1-12)와 다른 점은 장소의 차이, 누가의 가난한 사람이 마태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 누가의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이 마태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약간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마태와 달리 누가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피 우는, 그리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부요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칭찬받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다’(6,20-26)는 말을 덧붙여, ‘복 있는 사람화 있는 사람을 대립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들 대 부요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대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 대 지금 비웃는 사람들’, ‘박해 받는 예언자들 대 칭찬 받는 거짓 예언자들의 대립각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고,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경험과 현실에 일치하지 않습니다. 아니 전혀 반대되는 주장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불행하고, 부요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경험이고, 세상도 그렇게 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혹시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는 당첨된 복권을 준비해두셨거나, 뜻밖의 놀라운 행운을 예비해두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부자가 될 것이 약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가난을 이상화하거나, 가난한 삶에 무슨 영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가난한 현실을 감내하면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상받게 될 것이라고 보상을 죽음 이후로 유예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에게 가난, 굶주림, 애통함, 미움과 버림받음은 제자들의 실제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불행하고 불쌍하게 보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행복한 사람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과는 전적으로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이미 있기 때문에,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과 전혀 다른 나라에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나선 가난한 제자들을 부자로 만드심으로써 보상할 계획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관장이고 부자였던 키가 작은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2-9).

 

부자에 대한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요한 사람들이 화가 있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졸지에 가난해질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부자가 가난해 질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부요한 사람들에게 화가 있는 것은 그들이 그들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부 자체에 화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요한 자들이 화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여 현재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요한 사람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입 맞추는 하나님의 나라는 더더욱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에 만족해 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세상, 다른 삶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아무 것도 추구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와 저주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 만족하여 위안을 받고 있는 것 그 자체가, 그 순간이 저주받은 상태인 것이지요. 지상에서 받을 것을 이미 다 받은 사람들은 밖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의 기준은 오직 자기만족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 선언 외에,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미래형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웃게 될 것이지만,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고, 지금 웃는 사람들은 슬퍼하며 울 것이라는 것이지요.

상태의 변화, 아니 역전, 특별히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배부른 사람이 굶주리게 되고, 웃는 사람이 슬퍼하며 울게 되는 아래로의 변화는 저주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저주 또한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부른 사람들의 식탁을 뒤집고 그들에게서 먹을 것을 빼앗거나, 교만하게 남을 비웃는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그들의 악한 웃음을 애통함으로 바꾸심으로써 보상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있을 수 있는 변화, 기존질서의 변화 모두가 화이자 저주가 됩니다.

 

 

4. 그러나 주님의 이런 선포와 약속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 받고, 배척받고, 욕을 먹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악하다고 버림받습니다.’ 이 말씀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출교당하면서 핍박받았던 초대 교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기뻐하고 뛰놀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시간이 기쁨의 날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박해받는 제자들에게 약속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뛰놀 수 있을 만큼 큰 보상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보상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고전 15,19).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 밖에, 이 세상 위에 있는 것들을 바라는 사람들이지요. 비록 몸은 이 세상 안에 있으나, 결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그들을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15,19).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그들이 이 세상 질서와는 전적으로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의지하여, 죽어있는 자들 같으나, 사실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며 현재를 즐기며 사는 세상 사람들보다, 아니,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우셨다고 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한 편으로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현세주의, 혹은 허무주의를 경계하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악한 세상에 맞서 조금이라도 선한 삶을 살면서 좋은 세상 만들려 하다가 절망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은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인 죽음에 대한 승리이자(고전 15,26),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확증이자 보상입니다(고전 15,58).

그러므로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어있는 자들의 부활이 보상으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미리 보여주시고,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보상은 시체의 소생, 혹은 사후천국행이 아니라, 죽어 있는 자들의 변화입니다. 죄와 절망으로 죽어 있는 자들이 용서받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이런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큰 보상이자, 또한 보상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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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3 2019-04-07 사순절 다섯째주일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채수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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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1 2019-03-24 사순절 셋째주일    회개하지 않으면 채수일 목사
960 2019-03-17 사순절 둘째주일    자기 일을 스스로 끝내는 사람 채수일 목사
959 2019-03-10 사순절 첫째주일    악마 채수일 목사
958 2019-03-03 주현절 아홉째주일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채수일 목사
957 2019-02-24 주현절 여덟째주일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채수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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